섹소폰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알아본 인물~
재즈가 탄생한지 대략 30년이 지나기까지 이 음악의 제왕들은 전부 트럼펫 주자였다. 재즈를 창시했다고 불리는 버디 볼덴(1877-1931)이 트럼펫 주자였고 그의 뒤를 이어 재즈를 시카고로 퍼뜨린 조 ‘킹’ 올리버(1885-1938)도 그랬으며 그의 제자이자 재즈를 미국음악으로 정착시킨 루이 암스트롱(1901-1971) 역시 트럼펫을 불었다. 그것은 다분히 재즈밴드의 조상인 브라스 밴드, 다시 말해 고적대(Marching Band)의 전통이었다. 그러니까 행진곡의 특성상 트럼펫 파트는 늘 음악의 주선율을 연주해 왔는데 그러한 경향이 재즈로 옮겨지면서 트럼펫이 음악을 이끌고 여기에 다른 관악기들이 즉흥선율을 더하면서 결국 초기 재즈의 앙상블 형태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고적대를 브라스 밴드(금관악기 밴드)라고 부르는 것은 초기재즈의 상황에 비추면 그리 엄밀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뉴올리언즈의 브라스 밴드에는 목관악기인 클라리넷이 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클라리넷이라는 목관악기는 음악을 리드해 가는 트럼펫의 선율 위에서 고음역의 꾸밈음(obligato)을 즉흥적으로 넣어주는 역할을 했다.
이들 목관악기란 악기구조상 금관악기에 비해 그 성량이 작다. 교향악단의 연주를 보면 클라리넷이나 오보에, 바순 같은 목관악기가 음악의 조용한 부분에서 주로 등장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목관악기의 한계를 뛰어 넘으려고 벨기에의 악기 제작자 아돌프 색스(1814-1894)는 금관악기만큼 큰 성량을 가진 목관악기를 개발했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 완성된 악기가 그의 이름을 딴 색소폰이다. 하지만 이 신생악기는 그가 원했던 교향악단에서의 사용은 물론이고, 재즈밴드에서도 즉각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늘날 색소폰이 재즈의 상징처럼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대부분의 재즈 클라리넷 주자들이 색소폰이란 악기에 무관심했다고 해서 이 악기가 초기 재즈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았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다행히도 이 악기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알아본 인물이 시드니 베쉐이(1897-1959)라는 천재였다.
1917년 오리지널 딕시랜드 재즈밴드에 의해 최초의 재즈 녹음이 시작된 이래로 최소한 1920년대가 끝날 때까지 루이 암스트롱과 맞설 수 있는 즉흥연주자는 시드니 베쉐이가 유일하다. 앞서 설명했듯이 루이 암스트롱의 적수가 수많은 트럼펫 주자가 아니라 색소포니스트 베쉐이였다는 사실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클라리넷과 함께 소프라노 색소폰을 손에 쥐면서 당시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던 이 악기의 가능성을 간파했는데, 그가 첫 녹음을 남기기 이전이었던 1919년 서던 싱코페이티드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영국과 프랑스에서 공연을 가졌을 때 이를 지켜 본 지휘자 에르네스트 앙세르메의 극찬(“나는 이 천재 예술가의 이름을 적어두고 싶다. 나로서는 그 이름, 시드니 베쉐이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은 베쉐이의 이름을 오늘날까지 남게 한 첫 신호탄이었다.
이 찬사가 한낱 구름처럼 떠도는 전설로만 남지 않은 것은 4년 뒤에 녹음된 그의 최초 음반들이 바로 증명한다. 1923년 클레어런스 윌리엄스 블루 파이브의 음반 ‘Texas Moaner Blues'에서 베쉐이는 루이 암스트롱과 함께 이 밴드의 일원이 되어 그야말로 불꽃 튀기는 즉흥연주의 한판 대결을 펼친 것이다. 물론 이 곡 역시 당시 초기재즈의 전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전체 앙상블을 이끄는 것은 트럼펫이었다. 하지만 관악기 솔로가 펼쳐질 때 이 곡에는 그 이전의 어떤 곡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풍부한 성량의 거친 목관악기 소리가 등장하는데 그 소리는 적어도 이 곡에서만큼은, 놀랍게도 루이의 작렬하는 트럼펫 솔로를 압도해 버렸다. 그것이 바로 베쉐이의 색소폰이었으며(전 생애에 걸친 루이의 수많은 녹음 가운데 그가 솔로에서 주도권을 빼앗긴 경우는 겨우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일 것이다!) 그것은 이 연주자의 능력이자 동시에 자아였다. 다시 말해 그는 그 어느 밴드에서든 가장 주목받는 존재가 되길 원했으며 또 그럴만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성향은, 1923년부터 36년까지 무려 13년 동안 그가 참여한 녹음이 고작 24곡(겨우 CD 한 장 분량!)에 그친 이유를 역설적으로 설명해 준다. 다시 말해 당시의 재즈는 트럼펫-트롬본-클라리넷이라는 일정한 편성을 요구했지만 베쉐이는 클라리넷을 대신해 색소폰으로 그 규칙을 깨려 했으며 특히 트럼펫 주도의 전통을 애써 거부하려 했던 것이다. 존 칠튼이 지난 87년에 쓴 시드니 베쉐이에 관한 권위 있는 전기 [The Wizard of Jazz]는 베쉐이에 관한 수많은 소문들이 허구였음을 밝혀 냈지만 그의 성격이 자기 중심적이며 자아 도취적이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인정하고 있는데, 그러한 성향으로 말미암아 녹음과 공연은 늘 그를 배척했고, 그 결과로 그는 인생의 많은 시간을 미국 밖에서 보내야만 했다.
앙세르메의 찬사를 이끌어 냈던 1919년의 유럽 공연은 그의 긴 오디세이의 첫 장에 불과했다. 20년대를 통틀어 베쉐이가 미국에서 생활했던 것은 1922년부터 25년까지 단 3년뿐이었으며 그 후로 그는 6년간의 오랜 유랑에 오른다. 31년 그가 미국에 다시 돌아왔을 때, 그것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고 돌아오자 어느새 자신이 노인이 되어버린 것과 다름없었다. 재즈는 이미 뉴올리언즈 스타일을 벗어나 스윙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고 그는 ‘구닥다리’ 연주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루이 암스트롱처럼 뉴올리언즈 재즈 스타일을 버리고 스윙에 편승할 줄 아는 기질이 없었다. 33년 그는 동료 트럼펫 주자 토미 래드니어와 함께 음악계를 떠나 옷수선 겸 세탁소를 운영했으며 그것도 오래지 않아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베쉐이가 다시 미국에 돌아온 것은 30년대 말, 뉴올리언즈 재즈 복고운동이 일어났을 때였다. 미국 최초의 재즈 음악회(이전까지 재즈는 오로지 술집이나 카페에서 연주되었다)였던 베니 굿맨의 38년 카네기홀 콘서트가 대성공을 거두자 이 음악회의 제작자였던 존 해몬드는 이듬해에 미국 흑인 음악의 역사를 두루 살피는 ‘영가에서 스윙까지’라는 제목의 음악회를 같은 장소에서 열었는데 이 무대의 초청을 받은 베쉐이는 거침없는 즉흥연주로 청중들에게 재즈의 진수를 맛보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날 객석에 있던 독일인 청년 알프레드 라이온은 곧 미국으로 망명해 블루노트 레코드를 설립하고 베쉐이를 스튜디오로 불러 걸작 ‘Summertime'을 녹음했는데 이 음반의 성공이 명가 블루노트 레코드의 초석이 되었음은 이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를 계기로 베쉐이는 41년까지 빅터 레코드에서 많은 녹음을 남겼으며 그 작품들은 한결같은 걸작이었다. 하지만 뉴올리언즈 재즈로 돌아가자는 복고운동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41년 미국이 2차 세계 대전에 참가하자 음반업계는 위축되었으며 연주자들은 파업했고 음악은 재즈를 떠나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전후(戰後) 비밥이라는 또 다른 재즈가 등장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베쉐이는 49년 또 다시 미국을 떠나 프랑스로 이주했는데 그것은 그의 마지막 여행이 되었다. 10년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프랑스에 정착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가 에릭 홉스봄의 표현처럼 ‘행복한 망명’이었다. 그는 뉴올리언즈 재즈 복고운동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으며 특히 전후 재즈의 대중화가 급속도로 번지고 있던 프랑스에서 재즈의 상징처럼 대우받으면서 인생 그 어느 때 보다도 음악에 집중하며 살 수 있었다. 그것은 49년 이후 프랑스 보그 레이블에서 녹음한 많은 음반들이 증언해 주고 있으며(여기에는 그가 작곡한 소프라노 색소폰과 관현악을 위한 발레음악과 광시곡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52년에 녹음된 ‘Petite Fleur'(작은 꽃)는 그의 또 다른 명곡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프랑스 대중 음악 속에서 그를 예찬한 여러 노래들과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프랑스 리비에라에 세워진 그의 동상은 프랑스인들에게는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더 나아가 재즈는 본질적으로 프랑스의 음악이라는 일부 프랑스인들의 극단적인 궤변도 그래서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재즈가 프랑스 문화권 속에 있던 뉴올리언즈라는 곳에서, 그것도 아프리카인과 프랑스인 사이에서 태어난 크리올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특히 베쉐이(Bechet)라는 프랑스 성을 가진 거장이 초기재즈 시대에 살았고 그가 파리에서 뼈를 묻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망명이 늘 행복으로 채워졌을까, 의문을 던져본다. 그 역시 이후에 미국을 떠난 많은 재즈 뮤지션들처럼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뿌리뽑힌 한을 평생 짊어지고 살았을 것이다. 그는 너무도 오랜 세월 동안 미국에서 잊혀진 존재였으며 타국에서 받은 존경과 환대가 클수록 그는 고국을 저주하고 한편으로 그리워했을 것이다.
나는 그와 루이 암스트롱을 함께 생각하면, 훗날 비밥을 창시했던 두 사람, 찰리 파커와 디지 길레스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환희에 찬 그들의 트럼펫 소리처럼 늘 성공적이었던 루이와 디지에 비해, 베쉐이와 파커의 모습은 그들의 흐느끼는 색소폰 소리처럼 번뇌에 싸여 있으며 동시에 공격적이고 도발적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모습은- 악기와 상관없이- 이 세상과 투쟁하며 쓰러져 간 많은 재즈맨들의 삶을 보다 보편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빅밴드 리더 플레처 헨더슨의 작품집에 대해 존 해몬드가 붙인 제목처럼 재즈맨들의 삶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일종의 ‘좌절에 관한 한 연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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