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스

재즈의 인물들 /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

시나브로a 2012. 6. 21. 10:33

 

 

스스로 그의 악단을 '내가 좋아하는 악기'라고 불렀으며

사람들은 듀크 엘링턴(1899-1974)을 존경한다. 그리고 또 존경했다. 굳이 여기서 과거시제로 반복한 이유는 그는 사라진 전설의 거장으로 ‘이제' 추앙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생존해 있을 때에도 역시 존경받았다는 뜻이다. 엘링턴이 생존해 있을 때 누렸던 존경과 찬사는 재즈 역사 속에서 그 누구에게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하워드대학(63년)과 예일대학(67년)으로부터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69년, 그의 70세 생일 축하공연은 대통령 명예훈장 수여와 함께 백악관에서 성대히 치러졌다. 70년에는 국립 문학-예술 협회의 회원이 되었으며 71년에는 재즈 뮤지션으로는 최초로 스톡홀름 왕립 음악원의 회원으로 위촉되었다. 지난번에 이야기했듯이 엘링턴은 사후(死後) 그의 탄생 100주년(99년)을 맞이해 퓰리처상을 받았지만, 사실 그는 생존했던 61년에 퓰리처상 후보에 올랐는데 당시까지 엘링턴을 제외하면 이 상의 후보에 오른 재즈 뮤지션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엘링턴이 ‘미스터 재즈’라고 불렀던 루이 암스트롱마저 그 명성이 문화 지배계급에서 온 것이라기보다는 대중들로부터 온 것임을 생각할 때 확실히 엘링턴의 그것은 재즈 뮤지션으로서 너무도 특별한 위치에 있다. 제임스 링컨 콜리어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마도 찰리 파커(Charlie Parker)는 100세까지 살았다 하더라도 백악관 초청을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왜 그런 걸까? 왜 엘링턴에 대한 존경은 각별한 걸까? 오랜 세월동안 재즈에 끼친 지속적인 공로 때문에? 그렇다면 우린 엘링턴 말고도 몇몇을 더 꼽을 수 있다. 루이 역시 그랬고, 베니 굿맨(Benny Goodman),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 아트 블래키(Art Blakey) 등 모두가 그랬다. 그런데도 왜 엘링턴만은 특별한 것일까?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왜 전통적인 배타적 문화 지배계급은 엘링턴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걸까?

그것은 자명하다. 그것은 작곡에 대한 엘링턴의 남다른 성취 때문이다. 수천 곡에 달하는 그의 작품은 그로 하여금 유럽 고전음악의 전통을 잇고있는 현대 작곡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조지 거쉰(George Gershwin)과 같이 대중음악과 고전음악을 넘나들던 작곡가나, 파퓰러송을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은 콜 포터(Cole Porter), 어빙 벌린(Irving Berlin)과 같은 미국의 작곡가들도 있었지만 역시 말러, R. 슈트라우스, 쉔베르크, 베르크, 바르톡에 주목하던 음악 평론가들에게 관심을 끈 것은 역시 엘링턴이었다. 다시 말해 엘링턴의 작품은 단선율에 간단한 화성이 더해진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최소한 몇 명의 연주자가 나름의 숙련으로 함께 연주해야하는 새로운 기악음악, 재즈였던 것이다.
재즈는 고전음악에 없는 즉흥연주와 독특한 리듬을 지닌 기악음악으로서 이미 20세기초부터 몇몇 작곡가들, 예를 들어 드뷔시, 라벨, 스트라빈스키, 미요 같은 인물들로부터 관심을 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재즈밴드의 편성이 20년대 들어 플레처 헨더슨(Fletcher Henderson)에 의해 10인조 이상으로 확대되더니 폴 화이트먼(Paul Whiteman), 베니 모텐(Bennie Moten)과 같은 밴드리더들과 돈 레드먼(Don Redman), 베니 카터(Benny Carter)와 같은 선구적인 작곡가들을 통해 30년대를 전후해 하나의 형태로 완성되게 되었다. 그것이 소위 빅밴드(Big Band) 혹은 재즈 오케스트라의 탄생으로, 이 빅밴드의 완성된 앙상블을 가장 화려하게 성취했던 인물이 바로 엘링턴이었다.

대부분의 빅밴드들이 당시 대형화되었던 댄스홀에서- 그래서 보다 커다란 편성의 악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 춤추는 사람들에게 음악을 제공했던 것에 반해, 뮤지컬과 유사한 버라이어티 쇼(그것을 소위 레뷔revue라고 불렀다)가 공연되던 할렘의 명소 코튼클럽에서 엘링턴이 27년부터 31년까지 음악감독으로 일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초기 시절에 단순한 댄스음악을 작곡했던 것이 아니라 극적인 흐름을 지닌 무대공연 작품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엘링턴 오케스트라는 뮤트(mute)로 익살스럽게 찌그러뜨린 금관 사운드와 섬세한 클라리넷, 어두운 바리톤 색소폰이 더해진 풍성한 목관 파트를 통해 다른 빅밴드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색채감 넘치는 사운드를 빚어냈으며 코튼클럽을 떠나 33년 처음으로 유럽 투어에 나섰을 때 유럽 음악계가 이러한 자신의 사운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했다. 그리고 그러한 유럽 음악계의 각별한 관심에 부흥하듯 엘링턴은 대규모 모음곡 작품들을 평생에 걸쳐 작곡했다.




하지만 나는, 외람되지만 이로 인해서 오랜 시간 동안 형성된 엘링턴의 특별한 명예에 대해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작곡가 엘링턴만을 떼어내 그를 음악사의 한 거장으로 평가하는 것은 언뜻 전통적인 음악계가 재즈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정반대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재즈는 굳이 훌륭한 작곡가가 아니더라도 악기 하나로 훌륭한 즉흥연주를 만들어 낸 많은 거장을 보유한 음악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결코 고전음악의 범주로서는 평가할 수 없는 부분이다. 굳이 에르네스트 앙세르메의 찬사를 빌리지 않더라도 시드니 베쉐이는 20세기 음악의 거장이며 루이 암스트롱, 젤리 롤 모튼 역시 그렇다. 그것은 유럽음악이 자신의 입맛에 따라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유럽음악이 존경해온 ‘엘링턴 사운드’는 사실 오락음악으로 치부되어온 재즈의 전통에 막대한 빚을 지고 있다. 예를 들어 루이의 스승 킹 올리버(King Oliver)가 없었다면 엘링턴 밴드의 초기 트럼펫 주자 부버 마일리(Bubber Miley)의 기이한 뮤트 사운드는 없었을 것이며 베쉐이가 없었다면 40년 넘게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간판주자로 활약했던 자니 호지스(Johnny Hodges)의 흐느끼는 알토 사운드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들 연주자가 없었다면 듀크 엘링턴의 ‘작품’들도 없었다. 엘링턴의 작품은 탁월한 재즈 연주자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연주자가 없이는 불가능한 작곡이란 고전음악에서 한 작곡가가 특정 연주자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헌정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이야기다. 엘링턴에게 작곡은 연주 이전에 피아노에 놓인 악보 위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연주자들과 함께 집단적으로 행해지는 창작행위다. 멤버들의 여러 증언이 말해주듯이 엘링턴은 혼자서 대략의 악상을 피아노로 스케치해 오면 여기에 베이스와 드럼이 가미되고 그 위에 관악 파트가 입체적으로 입혀지면서 엘링턴의 작품은 완성되었다. 물론 그때 이 과정을 이끌고 세부를 주문하고 많은 시행착오 속에서 무엇을 선택하는가는 바로 밴드리더의 몫으로, 이러한 작곡방식은 엘링턴 이전, 젤리 롤 모튼에 의해 시작되어 엘링턴을 거쳐 찰스 밍거스로 이어지게 된다. 재즈에서의 작곡이 단순한 멜로디 혹은 코드 진행의 뼈대에서 섬세한 혈류를 지닌 보다 풍성한 육신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작곡가와 연주자의 상호작용이라는 하나의 공식 때문이며 이 공식을 현격하게 발전시킨 인물이 바로 듀크 엘링턴이다.

 

 




그의 작품이 일반적인 ‘트럼펫을 위한 협주곡’이 아니라 ‘쿠티를 위한 협주곡 Concerto for Cootie’이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니까 그는 고전음악 작곡가들처럼 독주악기를 위한 협주곡을 쓰는 게 아니라 특정 독주자를 위한 작품을 썼으며 실재로 그 독주자와의 상호 작용을 통해 작품을 완성했다. 그의 수많은 걸작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버 마일리, 자니 호지스, 쿠티 윌리엄스(Cootie Williams), 바니 비가드(Barney Bigard), 해리 카니(Harry Carney), 벤 웹스터(Ben Webster), 지미 블랜튼(Jimmy Blanton), 렉스 스튜어트(Rex Stewart), 클락 테리(Clark Terry), 폴 곤잘베스(Paul Gonsalves)와 같은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명연주자들을 함께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연주자가 곧 작품의 핵심이었던 만큼 엘링턴은 단원들을 기술적으로 관리했으며 실재로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구성은 다른 밴드들에 비해 훨씬 안정적이었다. 그의 리더쉽은 냉혹함과 자상함의 ‘양날’을 적절히 사용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그는 늘 자신의 위엄을 지켜갔다. 예를 들어 엘링턴은 마음에 들지 않은 단원을 직접 해고하는 일이 없었으며 뛰어난 단원이 떠날 때도 붙잡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는 천재 베이스 주자 지미 블랜튼을 발견했을 때도 기존의 베이스 주자를 해고하지 않아 한때 엘링턴 오케스트라에는 베이스 주자가 두 명일 때도 있었는데, 하지만 계속되는 연주 비교를 통해 기본의 베이스 주자는 나갈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엘링턴의 계산이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39년 총애 받던 트럼펫 주자 쿠티 윌리엄스가 베니 굿맨으로부터 파격적인 조건의 입단 제의를 받자 엘링턴은 결코 쿠티를 잡지 않았다. 오히려 보다 좋은 조건으로 이적하도록 베니 굿맨과 협상에 나섰다. 하지만 엘링턴은 아마도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굿맨 밴드에서 쿠티의 연주는 엘링턴 시절에 비해 그리 드러나지 않았는데 그를 돋보이게 해 줄 작품을 엘링턴 이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쿠티는 1년 후 독립해서 자신의 밴드로 잠시 각광을 받았지만 결국 62년 다시 엘링턴 오케스트라에 합류하게 된다.
하지만 이렇듯 섬세한 듯한 엘링턴도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타인에게는 물론이며 단원들에게도 철저히 감췄던 냉혈한이었다. 엘링턴의 아들이자 엘링턴 타계 후 악단을 인계했던 머서 엘링턴(Mercer Ellington)은 아버지를 존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늘 가족에게 무관심하고 자기에게 냉정했던 아버지에 대해 깊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렉스 스튜어트의 기억은 다르다. 엘링턴은 단원들의 개인적인 대소사를 은밀히 챙겨 주었으며 마음속의 배려를 표현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린 엘링턴의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교활하리만치 섬세했던 엘링턴의 통솔력은 엘링턴 음악의 핵심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오선지 위의 작곡가가 아니라 연주를 통해 작품을 완성한 위대한 ‘재즈’ 작곡가였으니까.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편곡자 빌리 스트레이혼(Billy Strayhorn)의 말처럼 “엘링턴은 피아노를 연주하지만 실재로 그의 악기는 그의 밴드”였으므로. 전통적인 관점은 그를 작곡가로 보고 싶겠지만, 글쎄, 그 역시 밴드를 연주한 재즈연주자가 아니었을까.

 

♡Jo Jo (Gino Vanelli) 부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