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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의 인물들 /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시나브로a 2012. 6. 21. 10:29

 

재즈 100년의 인물들5 ::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는 장르를 떠난 모든 음악에 있어서 동시대의 연주자와는 다른 아우라를 가지고 있다. 당대의 최고의 연주자들이였던 클리포드 브라운Clifford Brown, 리 모건Lee Morgan, 블루 미첼Blue Mitchell, 프레디 휴바드Freddie Hubbard같은 오방지게 연주를 잘하는 연주자와 비교할 때 굉장히 뛰어난 연주 실력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많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왜 그를 현대 재즈의 아이콘으로 꼽는 지는 그가 반세기를 걸어온 음악적 행보를 살펴보면 그 답이 나온다.

 

마일즈 데이비스는 40년대 중반부터 91년 10월 28일 사망하기 전까지 그의 음악적 행보는 재즈역사와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저 단순한 연주활동이 아닌 재즈라는 음악에 창조적인 스타일과 새로움을 부여하면서 역사를 이끌었던 그이기에 마일즈 데이비스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그만큼 대단한 것이다.

 



Miles Davis. 본명 Miles Dewey Davis III는 1926년 5월 26일에 치과의사였던 아버지 Miles Dewey Davis, Jr.와 음악교사였던 어머니 Cleota Mae Henry Davis사이에서 태어났다. 치과의사였던 아버지로 인해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마일즈 데이비스는 음악교사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음악에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13살에 트럼펫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그는 음악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키워간다.

당시의 흑인 재즈뮤지션들처럼 그 역시 10대 때부터 동네 지역의 술집, 클럽에서 연주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본격적인 음악 활동은 17살에 에디 랜달 밴드 Eddie Randle's Blue Devils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때부터 그는 그의 독특한 감각의 트럼펫 연주를 보여주는데 이 당시 클라크 테리(Clark Terry)의 만남으로 인해 느낌이 강한 바이브레이션보다는 약간은 가벼운 듯한 느낌의 연주를 보여준다.

그의 어린 시절은 매우 평범한 시절을 보냈다. 수줍음이 많았던 그의 성격은 외로움으로 점철된 시절 이였다고 한다. 수줍고 내성적인 마일즈 데이비스에게는 인종차별이 심했던 당시에는 흑인으로서 세상을 약간은 삐뚤게 바라본 아이였다. 이러한 그의 성격은 훗날 그의 연주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당대의 호방한 연주를 들려주었던 연주자들과는 달리 그의 연주에는 지독한 외로움과 냉소가 공존해 있다.

 

 

 



인생에서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은 매우 중요하다. Miles Davis의 음악적인 행보와 그 성공에는 분명 사람과 사람이 존재했다. 그 첫 번째 만남은 Charlie Parker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최고의 인기 밴드중 하나였던 빌리 엑스타인 빅 밴드(Billy Eckstine's Big Band)에 들어가면서 그의 음악생활에 있어서 가장 큰 전환점을 맞게 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 밴드에 Charlie Parker가 함께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Miles Davis를 눈여겨 본 Dizzy Gillespie는 그를 Charlie Parker에게 소개를 시켜주는데 이것은 그의 음악 일대에 가장 큰 이벤트였고 그가 죽기 전까지 이 때의 만남은 Miles Davis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 빌리 엑스타인 빅 밴드에서 2주간 함께 활동을 했던 Miles Davis는 Charlie Parker로 인해 음악에 대한 욕구로 뉴욕에 있는 줄리어드 음악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이론만으로 무엇인가 부족했고 오히려 음악에 대한 영감이 퇴화한다고 느꼈던 마일즈는 Charlie Parker와 그 악동들을 따라다니면서 음악에 대한 넓은 식견과 Charlie Parker의 형식과 템포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그의 음악을 무대위에서 함께 체득해 갔다. 이 당시에는 Benny Carter, John Lewis, Max Roach같은 연주자들과 음악적인 교류와 활동을 하게 된다. 비록 Charlie Parker는 부유했던 Miles Davis를 통해 마약을 구할 돈을 얻었지만 마일즈 데이비스는 찰리 파커로부터 음악적인 면에서 그리고 비즈니스적인 면에서 많은 것을 배워갔다.

 

 



48년 어느 날 Donna Lee(찰리 파커의 곡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마일즈 데이비스의 곡이다)의 악보를 얻기 위해 한 백인이 마일즈를 찾아왔다. 이 만남은 후에 49년에 발매된 Cool Jazz의 효시가 되는 명반 ‘Birth of The Cool’ 탄생을 만들어 낸다.

그 백인은 바로 재즈 신에서 빼 놓을 수 없는 편곡자였던 Gil Evans였다. 마일즈는 편곡의 중요성을 Gil Evans로부터 배우게 된다. 이 편곡이라는 것은 당시에 흑인 연주자들 특히 Bopper (Bop 계열의 연주자들을 흔히 밥퍼라고 한다)에게 있어서 짜여진 편곡보다는 즉흥적인 연주에 더 치중을 했다면 백인연주자들에게 이 편곡은 백인에게 없는 단점을 보완해 주는 일종의 장치와 같았다.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다는 것을 Birth Of The Cool을 통해서 보여준다. 40년대 흑인은 흑인들끼리 연주해야한다는 (인종차별로 인한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일종의 보이지 않는 약속을 깨 버린다. 백인과 흑인 연주자라는 이분법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은 사실 그다지 좋은 접근법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엔 백인과 흑인연주자들 사이에서는 그들만의 개성이 존재했다. 마일즈 데이비스는 바로 그러한 점들을 ‘Birth Of The Cool’에 녹여냈다. 이 음반에 참여한 Gerry Mulligan, Lee Konitz, Bill Evans에 대해 왜 백인을 참여시켰냐는 많은 비난에 대해 마일즈는 한마디로 묵살해 버렸다. ‘어디 Bill Evans, Gerry Mulligan나 Lee Konitz처럼 연주할 수 있는 연주자를 데려오라고 해봐!’

 

 





그는 공연 중에 관객으로부터 등을 돌려 연주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만큼 그의 삶은 남들과 다른 독선과 오만 내지는 특유의 건방짐(?)으로 뚤뚤 뭉쳐진 스타일리스트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러한 독선과 건방짐에는 ‘변화’라는 이 단어도 함께 따라왔다. 그 변화라는 것은 10년을 주기로 재즈 신에 커다란 획을 긋는 음반을 발매하게 된다.

49년 Birth Of The Cool이후 59년에는 모달 기법을 도입한 현재의 모던 재즈의 초석을 마련한 Kind Of Blue를 발표했고 69년도에는 퓨전 락 시대를 열었던 Bitches Brew를 발표한다. 이러한 단편적인 디스코프라피만으로 그의 모든 것을 설명하기 힘들지만 ‘재즈계의 피카소’라는 별명처럼 그는 새로운 변화를 주도해 가고 왕성한 창작활동을 해왔다.

그것은 그가 사망하기 전까지 끊임없이 이뤄져 왔다. 사담이긴 하지만 마일즈 데이비스를 보면 세상은 공평하다는 말이 맞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천재는 요절한다’라는 말마따라 락씬에서나 재즈씬에서도 그런 경우가 많았다.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가 그랬고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이 그랬으며 재즈 신에서는 클리포드 브라운, 리 모건같은 연주자들이 그랬지만 마일즈는 상당히 오래(?) 살아왔다.

짧고 굵게 살았던 다른 천재와는 달리 마일즈는 길고 굵게 살면서 재즈의 역사를 새로이 써나간 천재였다. 50년 이상 재즈 신을 달군 그였지만 지독한 외로움과의 싸움이였다. 수많은 연주자들과 함께 그리고 그를 보러 온 수많은 관객들과 함께 무대 위에 있었음에도 관객들을 외면하고 뒤로 돌아서서 연주하는 기행을 보여 왔던 마일즈 데이비스.

오히려 이 지독한 외로움과 냉소적인 그의 태도가 지금의 마일즈 데이비스를 있게 하지 않았나 싶다. 그가 태어난 5월에  It's Never Entered Mind, Blue In Green을 들으면서 느껴지는 따뜻하지만 지독한 외로움과 냉소가 묘한 감동을 일으킨다.

 

 

Fantasy / Miles Dav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