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스

블루스 가이드 그리고 역사 5

시나브로a 2012. 6. 21. 10:56

 

메이저 레이블들은 블루스에서 손을 뗐지만, 어떤 사운드가 통할지 잡아낼 수만 있다면 여전히 블루스 시장은 남아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사람들 중 가장 주목해 볼만한 사람들은 시카고의 Phil Chess와 Leonard Chess, 멤피스의 Sam Phillips, L.A.의 Saul Bihari, Jules Bihari, Joe Bihari이다. 이 세 레이블은 재능 있는 뮤지션을 찾고 있었고, Chester "Howlin' Wolf" Burnett의 작품을 놓고 최소한 한 차례 삼자간의 줄다리기를 벌인 적이 있다.

Chuck Berry

Bo Diddley


Chess Records는 가장 널리 알려진 레이블인데, 그들이 유명해진 것은 부분적으론 Chess에 소속된 블루스 스타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고, 훗날 Chuck Berry와 Bo Diddley의 음악을 가지고 Rock & Roll에 성공적으로 진입했으며, Ramsey Lewis의 작품을 통해 Jazz에도 성공적으로 진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Chess는 2차 대전 이후에 생겨난 회사인데, 처음에는 Aristocrat라는 이름이었고 이 레이블에서 나온 레코드들은 40년대 중반 빅밴드 블루스 스타일의 음악이 많아서 메이저 레이블에서 나온 음악들과 별 차이가 없었고, 설립자인 Phil Chess와 Leonard Chess가 소유한 클럽의 출연진도 별 차이가 없었다.

1930년대 이래 시카고에서 블루스는 상당히 여러 인물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당시, 1920년대가 끝날 즈음부터 1930년대가 끝날 때까지, Tampa Red는 밴드리더이자, 기타리스트이자, 싱어이자, 작곡자로서 시카고 블루스 무대의 거물이었다. 어떤 설명을 들어봐도, Tampa Red의 아파트는 낮이던 밤이던 모든 종류의 뮤지션들의 메카이자 만남의 장소이자 소굴이었고, Tampa Red의 아내는 언제나 즐겁게 그들을 대해주었다고 한다. 훗날, 30년대 후반부터 40년대 끝무렵까지 시카고 블루스의 거물은 Big Bill Broonzy
였다.

Tampa Red

Big Bill Broonzy


Tampa Red와 Big Bill Broonzy는 전성기 시절 거의 대부분 Victor의 Bluebird 레이블에서 레코딩했다 -- Tampa Red는 Chess 레코딩 일부에 세션으로 참가했고, 50년대 초반 자신의 사촌 Washboard Sam과 함께 Chess에서 몇 곡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후계자였던 거물급 밴드리더이자, 기타리스트이자, 싱어이자, 작곡자였던 사람은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Chess Records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 그 사람이 바로 Muddy Waters이다.

델타에서 이주해 온 McKinley Morganfield (aka Muddy Waters)는 1947년부터 Chess에서 레코딩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전에 Columbia에서 싱글을 레코딩했고, 그 이전에는 John Lomax와 Alan Lomax의 야외 레코딩에 참여한 적이 있다.(아마도 이런 식으로 소개되어 델타 블루스와 상업적 블루스 세계 양쪽을 가로지르고 상업적 블루스 세계의 정상에 오른 사람은 Muddy Waters 뿐이었을 것이다) 이후 그는 Sunnyland Slim의 도움을 받아 Sunnyland Slim의 레코딩에 세션으로 참여하면서 Chess로 오게 된다. Chess로 온지 얼마되지 않아 Muddy Waters는 자신의 레코드를 내놓았다. Muddy Waters의 강력한 목청에서 Guttural 나오는 보컬과 일렉트릭 기타의 결합은 미시시피 델타 블루스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Robert Johnson이 2차대전 이전에 연주해 온 어쿠스틱 컨트리 블루스에서 파생된 것이다. 다만 Muddy Waters
쪽 사운드가 보다 크고 보다 강력하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게다가, 그의 음악은 잘 팔렸다. Chess Records는 생생한, 그리고 파도처럼 밀려오는 일렉트릭 블루스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위한 시장을 어느날 갑자기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런 블루스는 이전 10여년간 시카고를 지배했던 상업적인, 댄스 밴드 타입의 블루스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곧 Chess Records는 Little Walter Jacobs, Howlin' Wolf, 그리고 Sonny Boy Williamson II 같은 새로운 세대의 블루스 스타들의 음악을 레코딩했고, 뒤에는 Jimmy Rodgers, Buddy Guy, 그리고 Koko Taylor 같은 타고난 재능의 연주자 겸 싱어들의 음악을 레코딩했다. Chess의 역사 초기에 Chess는 Robert Nighthawk 같은 오래된 블루스 스타가 레코딩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고, 이 때 나온 "Sweet Black Angel"에 Willie Dixon
이 베이스로 음반에 데뷰하게 되었다.

Biari Brothers는 자신들 소유의 여러 레이블인 Modern, RPM, 그리고 Crown에서 Chess에 비견할만한 일관된 활동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도 B.B. King, Elmore James, 그리고 (briefly) Howlin' Wolf 같은 스타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레이블들의 활동은 Chess 소속 뮤지션만큼의 통일성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레코드를 파는 방식에 있어서만큼은 더 야심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 B.B.King이 1960년 Crown을 떠난 뒤, Bihari Brothers는 B.B.King의 가장 인기있는 곡들을 모아 훌륭한 앨범 둘을 내놓았고 B.B.King
의 싱글 일부를 더빙하면서 관악기 연주를 추가해 스테레오 효과를 만들어 내도록 리마스터링했다.

Sam Phillips의 Sun Records는 Elvis Presley를 발굴한 것으로 유명하며(많은 사람들의 견해를 따르자면, Elvis Presley는 Sun Records에서 그의 최고의 음악을 내놓았다) Johnny Cash, Jerry Lee Lewis, Carl Perkins, 그리고 Roy Orbison 등이 초기에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Sam Phillips는 중요한 블루스 음반 역시 세상에 내놓았다. Sam Phillips는 Memphis 최초의 근대적인 스튜디오인 Memphis Recording Services를 설립했고 여기에서 멤피스 지역의 Blues뮤지션들과 R&B 뮤지션들의 곡을 내놓았다. Sam Phillips는 다른 지역에 있는 레이블에게도 Memphis Recording Services 이용 허가를 내주곤 했다 - 주 이용자는 시카고의 Chess, L.A.에 있던 Bihari Brothers 소유의 Modern이나 RPM 등이었다. 오늘날까지도 Sam Phillips는 Chester "Howlin' Wolf" Burnett을 자신이 발굴한 최고 뮤지션이라고 생각하고, 만일 Chester "Howlin' Wolf" Burnett가 그와 함께 있었더라면 Little Richard 같은 거물급 Rock & Roll 스타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Howlin' Wolf는 Sam Phillips와 함께 첫번째 음반을 내놓았고, 멤피스의 그 프로듀서(Sam Phillips)가 자신이 발굴한 새로운 스타인 Howlin' Wolf를 잃은 뒤 처음엔 Bihari 형제들에게 갔다가, 뮤지션 트레이드와 계약 분쟁이라는 아주 복잡한 과정의 일부로 이번엔 Chess로 옮겨갔다. Howlin' Wolf의 진정한 첫번째 레코드 "Moanin' at Midnight"는 블루스에서건 블루스 아닌 음악에서건 이전에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사운드[ crossing feedback and a basso moan from the six-foot-four Wolf ]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그 뒤 23년간 계속해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Phillips가 레코딩한 다른 주요 뮤지션으론 싱어인 Jackie Brenston과 기타리스트 Ike Turner 등이 있고 -- Ike Turner는 같은 밴드의 일원으로서 “Rocket 88”을 레코딩했는데, 이 앨범은 최초의 "rock & roll" 레코드로 언급되곤 한다 -- 그리고 Sun 레이블로 설립된 1950년대 끝무렵엔 기타리스트이자 싱어인 Frank Frost 등이 있었다.

전후 블루스 역사에 많은 공헌을 한 다른 레이블로는 L.A. 기반의 Imperial Records가 있다. Imperial Records는 텍사스 블루스맨 T-Bone Walker와 Li'l Son Jackson 등의 음악을 레코딩했다 -- T-Bone Walker가 Imperial Records의 레코드에서 보여준 연주는 Chuck Berry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Chuck Berry는 Chess의 스타가 된다 ; 미시시피 기반의 Trumpet Records는 Sonny Boy Williamson II와 (briefly) Elmore James가 자신의 음악 경력을 시작한 곳이다 ; 그리고 시카고의 Cobra Records는 1956년부터 1958년 몰락할때까지 Chess Records와 경쟁하려고 노력했다. Cobra Records는 Otis Rush -- Otis Rush는 그의 사운드가 Muddy Waters와 너무 비슷하다는 이유로 Chess로부터 거부당했다 -- 를 보유했을 뿐 아니라 Cobra Records는 Buddy Guy가 시카고에 왔을 때 Buddy Guy와 첫번째로 계약한 레이블이기도 했으며, 또한 기타리스트 Magic Sam과 Ike Turner의 Kings of Rhythm을 보유하기도 했다 : Cobra Records가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던 시기는 1956년이었는데 이 시기는 Cobra Records가 Chess의 베테랑 프로듀서이자, 편곡자이자, 작곡자이자 베이스 주자였던 Willie Dixon
의 도움을 얻었을 때였다.

Tampa Red

Sonny Boy Williamson Ⅱ


Imperial이 블루스 쪽에 관여 시기는 1950년대를 넘어서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작은 레이블 역시 오래 버티지 못했다. Trumpet는 1950년대 초반 파산했는데, 이 사건은
Sonny Boy (Rice Miller) Williamson이 그곳에서의 계약이 끝났을 때 Chess에겐 행운으로 드러났다. Cobra는 1958년 문을 닫았는데, 활동한지 겨우 2년 만의 일이었다. Trumpet과 Cobra에서 나온 음반들은 제대로 혹은 널리 배포되지 않았다 -- Cobra에서 나온 음반들은 이 회사가 문닫은지 33년 뒤인 1993년 Capricorn Records에서 Cobra에 헌정한 박스 셋을 출시하기 전까지는 진정한 의미에서 전국적인 음반 배포를 실시한 적이 없다. Bihari 형제나 Sun 역시 1960년대 초반을 넘어선 뒤로는 거의 활동을 못했다. 그러나 이 회사들은 Chess와 함께 모던 블루스 레코딩이 세워진 토대가 되었다.

이 레이블들은 40년대 후반 그리고 50년대 초반과 중반기에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들 생각으론 거의 모든 흑인 청취자들에게 블루스 싱글들을 팔았다. 그러나 그들이 깨닫지 못한 것은 청취자들 중, 특히 50년대 초, 중반이래의 청취자들 가운데엔 소수의 젊은 백인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소수의 젊은 백인 청취자들은 흑인 라디오 방송을 들었고 때때로 흑인 음악 레코드를 샀으며 심지어는 콘서트에 가기도 했다. “우린 백인들을 위해 연주하지 않습니다” B.B.King
은 1957년 이렇게 말하고는 덧붙이기를, “물론, 하루짜리 공연에 들으러 온 백인들이 좀 있기는 했습니다.”

거의 대부분 레이블과 뮤지션들은 백인 청취자가 적지만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현상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확신이 없었다. 결국 어느 누구도 이미 상당한 수로 존재하는 흑인 블루스 청취자들을 소외시키지 않으면서 어떤 방법으로 백인 청취자에게 접근할 수 있는지 말할 수 없었다. 더구나 블루스 레이블들은 모두 소규모였고 독립 레이블이었다 -- 개중 가장 성공을 거둔 레이블인 Chess 조차도 1960년대 말까지는 가족들이 운영하는 회사로 남아 있었다 -- 이들이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은 한정되어 있었다. 1948년 LP 레코드가 도입되었을 때, 거의 모든 쟝르의 프로듀서들은 즉각 LP 레코드와 관련된 작업을 벌여나갔다. 클래식 음악은 분명 가장 큰 수혜자였다. 클래식 청취자라면 교향곡을 6장 내지는 그 이상의 shellac 78회전 레코드 모음에 담아 둘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결국 재즈 레이블도 이에 따라왔다. 연주자들과 프로듀서들은 쉬지 않고 15분에서 20분 정도에 달하는 레코딩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팝 음악도 동참했다. 팝 음악은 각 노래를 위한 기본 포맷으로는 45회전 디스크를 사용하고 곡들을 모아 놓은 것을 위한 매체로 LP를 활용했다.

그러나 블루스는 달랐다. 블루스 청취자들은 팝이나 클래식 청취자들보다 훨씬 가난했다 -- 78회전 플레이어는 1950년대 후반까지는 여전히 보편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LP 레코드에 대한 뚜렷한 수요도 없었다. 더구나 당시에는 클래식 음악이나 재즈와 같은 의미에서의 블루스의 역사라는 생각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 블루스는 그냥 돈 벌기 위해 나온 것이었고 블루스의 과거는 클래식과 재즈의 과거가 각 청취자나 이를 취급하는 회사에게 중요했던 것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2차대전 이전에 레코딩된 수많은 블루스, 특히 1930년대부터 나온 컨트리 블루스는 무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컨트리 블루스의 거장들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며 그들 상당수는 1930년대 중반 Paramount같은 레이블의 몰락과 함께 사라졌다 : 심지어는 ARC나 Vocalion처럼 메이저 회사에 흡수된 레이블의 창고에 남아 있던 거장들의 레코드도 사라진 것이 부지기수이다. 블루스 분야에서 활동한 회사들은 모두 2차대전 이후에 설립된 회사들로 2차대전 이전의 블루스에 접근할 길이 없었다.

1954-1956년 Rock & Roll의 탄생은 블루스에 맞추어져 있던 잠재적 백인 청취자들의 관심 상당 부분을 다른 곳으로 돌려 버렸다. 같은 이유에서 R&B는 젊은 흑인 청취자들을 Muddy Waters와 Howlin' Wolf
같은 뮤지션들의 음악으로부터 점차 멀어지게 했다. 이로써 1950년대 말에 블루스 음악을 가지고 사업을 하는 일은 더욱 힘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전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희망이 생겨났다. 좀 나이 먹은 -- 대부분 대학생 또래의 청취자들로 이들은 십대의 불안을 담은 노래에 대한 인내심이 부족했거나 이런 노래가 별로 필요하지 않았던 -- 백인 청취자 그룹은 점차 블루스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Chess나 Bihari 형제들의 눈길을 끌었지만 (비록 본인 말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Sun Records의 Sam Phillips는 이런 사람들은 50년대 초기부터 계속 있었다고 확신했다) 그들이 얼마나 되고 어떻게 접근해야할지 확실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블루스에 관심을 잃은 흑인 청취자를 대체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변화는 1950년대 말에 다가왔고 무대 위에서 일어났다. Muddy Waters와 Howlin' Wolf의 레코드는 잘 팔리고 있었고 B.B.King 역시 수많은 청취자를 거느리고 있어서 그가 Bihari 형제와 맺은 계약이 만료되자마자 상당히 많은 레이블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1958년 Muddy Waters는 처음으로 영국에서 공연을 하게 됐는데, 영국 청중들에게 받은 반응은 그를 정말이지 깜짝 놀랄만한 것이었다. 저 바다 건너로부터 레코드로만 그의 음악을 들어왔던 수만명의 사람들이 무대에서 그를 환호했고 그의 노래와 연주 마디마디에 완전히 빠져들었기 때문이었다. 1년 뒤 Muddy Waters
는 Newport Folk Festival에 모습을 드러냈다 - 이번엔 수천명의 미국인 청중들 앞이었다. Muddy Waters가 자기 이름을 걸고 공연했던 중 가장 많은 단일 청중이 모인 것이었고 이들 대부분은 백인이었고 이들은 그의 밴드에 미친듯이 열광했다. 이 실황을 담은 라이브 앨범은 30년 동안 Chess의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그제서야 블루스 청취자가 사람들이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이 청취자들에게 접근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다. 백인 청취자들은 Muddy Waters와 Howlin' Wolf 같은 모던 시카고 블루스맨들의 음악을 좋아했고 B.B.King의 콘서트에 떼지어 몰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Skip James, Mississippi John Hurt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Furry Lewis 같은 진짜 오래된 블루스맨들의 음악을 듣고 싶어하기도 했다. Furry Lewis
는 앨범 레코딩에서 손뗀지 30년이 지난 후에 다시 등장했는데 그는 꽤 성공을 거두었고 뒤엔 영화에 진출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고무적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혼란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특히 이 시기에는 흑인 청중들이 변하고 있었다 -- 나이든 팬들은 여전히 Muddy Waters와 Howlin' Wolf를 들었지만 젊은 흑인들은 보다 세련된 모던 어번 사운드와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은 사운드 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젊은 흑인들에겐 Muddy Waters, Howlin' Wolf, Furry Lewis
그리고 1960년대 재발굴된 어쿠스틱 블루스 연주자들은 지난 시대의 유물이며 기대할 것이 없는 역사일 뿐이었다. 시민권 운동과 흑인 인권 운동이 일어나자 블루스는 시대에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이게 되었다.

자신의 레코드의 사운드를 보다 세련되고 소울풀하게 만들기 위해 -- 그리고 보다 덜 컨트리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 이미 Muddy Waters는 1955년 이후엔 스튜디오 레코딩에선 기타 연주를 하지 않았다. 이는 아주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왜냐하면 2차대전 이후 시카고의 최고 기타리스트의 반열에 있던 Muddy Waters
가 자신의 첫번째 오리지날 스튜디오 앨범 <MUDDY Broonzy Bill Big Sings Waters>을 레코딩하면서 자신의 악기에 손대지 않고, 1963년에서야 스튜디오 앨범인 <FOLKSINGER>앨범에서 자신의 악기를 들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Chess와 Cobra는 항상 좋은 곡을 원했고 Willie Dixon은 대중의 귀를 끌어당기는 영리한 곡을 쓸 수 있는 솜씨를 갖고 있었고 그의 솜씨는 이미 검증된 것이었다. 이는 광범위하게 입증되었는데, 1960년대 그의 곡은 Peter, Paul & Mary에서 Cream에 이르는 백인 뮤지션들의 레퍼토리가 되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Willie Dixon의 작곡 능력은 Muddy Waters와 Howlin’ Wolf
그리고 그의 곡을 레코딩할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 도움이 되었다.

때로 연주자들은 이런 상황과 자신들에게 주어진 요구에 혼란스러워했다. Muddy Waters는 1940년대 중반 시카고에 온 이래로 일렉트릭 블루스를 연주해 왔고, 그때 이래로 자신의 연주를 듣는 흑인 청중들은 더 이상 어쿠스틱 컨트리 블루스를 원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어쿠스틱 컨트리 블루스가 진부한 시대에 뒤쳐진 사운드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Muddy Waters가 1958년 첫번째 영국 투어에 나섰을 때 -- 이 때 Muddy Waters
는 자신이 출연했던 어떤 개별 쇼보다도 더 많은 돈을 받았다 -- 영국 청중들이 시카고 스타일의 일렉트릭 블루스에 전혀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일렉트릭 기타를 내려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4년 뒤 Muddy Waters가 어쿠스틱 기타를 들고 다시 영국에 갔을 때, 그 때 영국에서 연주하는 블루스는 모두 일렉트릭 블루스였다. 그리고 1963년 Muddy Waters가 새 앨범을 내게 되었을 때, Chess Records는 당시 유행하던 포크 음악 리바이벌 붐을 이용하려고 Muddy Waters에게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게 해서 <FOLKSINGER>앨범을 레코딩한다. 이 앨범은, 이전에 1941년 John Lomax와 Alan Lomax가 델타에서 그의 어쿠스틱 기타 연주를 야외 녹음했던 이후 Muddy Waters가 처음 내놓은 어쿠스틱 곡들이다. 이후 발표한 싱글에서 Muddy Waters는 일렉트릭 기타로 돌아갔고 이때 Sammy Lawhorn와 PeeWee Madison
두 명의 기타리스트와 함께 연주했고, 완전히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인 <MUDDY, Blues the and Brass,>앨범을 내놓았다.

Muddy Waters의 Chess 동료인 Howlin' Wolf는 이와는 반대로 청중들의 이런 모순적인 요구에 무관심한듯이 보였다. 독특한 보이스를 가졌고 하모니카(그는 하모니카를 Rice Miller aka Sonny Boy Williamson II에게 배웠다)와 기타에 출중한 재능을 소유했던 이 거구의 사나이는 195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은퇴할 때까지 똑같은 방식으로 연주했다. 사실 "Smokestack Lightning"과 "Sitting on Top of the World" 같은 그의 곡들이 백인 락 밴드의 주요 레파토리가 된 후에도 자신의 레파토리에 특별히 집어 넣거나 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그가 백인 대학생 청중들 앞에서 연주할 때도 그럴 정도였다. 이 때문에, 몇몇 블루스 가이드에 나온 것과는 달리, Howlin’ Wolf 의 1971년 콘서트 앨범 <LIVE and Revisited Alice's (At Cookin')>는 후반기에 당시에 흐름을 따르려는 시도를 보여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애 마지막 시기 동안의 콘서트 연주를 솔직하게 보여준 것이다 (이 앨범은 특히 CD에 수록된 보너스 트랙 덕에 더욱 강력한 앨범이다). 그러나 Chess Records가 Howlin’ Wolf에게 <THE New Wolf Howlin'>을 사이키델릭 스타일로 다시 레코딩하자고 하면서 Wolf의 음악이 아닌 다른 음악을 덮어 씌우고 그에게 타협하라고 압력을 가하자 이는 시작부터 재난이 되고 말았다. Howlin’ Wolf는 공공연히 Chess Records를 “Dogshit”라고 떠들고 다녔다.

1960부터 1963년 사이에 Muddy Waters는 베스트 앨범을 포함해 세 장의 앨범을 내놓았는데, Chess Records와 맺은 초기 13년 동안의 계약 시기에 내놓은 것보다 3장이 많은 것이었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반 사이에 B.B.King를 듣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서 백인 청취자들도 B.B.King을 듣게 되었다. Bihari 형제의 Crown 레이블(소문에 따르면 이 레이블은 자사 LP를 한 장당 겨우 1.99$에 팔았다)은 1960년대 그의 싱글을 모은 두 가지 컬렉션을 출시했고, ABC-Paramount는 1963년 B.B.King의 LP를 내놓았다. 그러나 B.B.King이 진정으로 크로스오버로 성공한 첫번째 앨범은 1965년 내놓은 <LIVE the Regal at>이었다. 이는 분명 아이러니컬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LIVE Regal at The>은 열광하는 흑인 청중 앞에서 벌이는 블루스 쇼를 포착한 마지막 시도 중 하나였지만, 이 앨범은 B.B.King을 막 알게 된 백인 청중을 끌어당기는 자석 노릇을 했기 때문이었다. (B.B.King이 알려진 것은 그가 일련의 크로스오버 활동 덕이었고, 특히 그의 크로스오버 히트곡 “The Thrill is Gone” 덕택이었다. 그의 크로스오버 활동은 주로 라스 베가스에서 프랭크 시나트라의 이름이 붙은 무대에서 연주한 것이었는데, 프랭크 시나트라는 B.B.King의 연주에 자신이 직접 승인을 해주어야 했다…. 뭔 말인지 T_T) 1960년대 B.B.King은 Muddy Waters
보다도 더 여러 차례 블루스 최고 연주자의 자리에 올랐고, 블루스를 락 음악의 주요 원천으로 간주하고 환호하며 증가했던 백인 청취자들을 끌어 들인 주요 인물이 되었다.

1960년대 중반까지 블루스는 꽤 큰 사업이었고 앨범 세션은 대부분 연주자들에게 꽤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심지어 2차대전 이전에 주로 활동했다가 재발견된 스타들 역시도 그랬는데, Bukka White, Mississippi John Hurt, Skip James 그리고 Arthur Crudup
이 이런 경우였다. 이 중 Arthur Crudup은 이미 수십년 전에 음악을 그만 둔 바 있다. The Rolling Stones는 시카고의 Chess Records를 방문해서 1964년 세션 중 자신들의 베스트 곡 일부를 내놓았다. ("It's All Over Now," "Mona," "I Just Can't Be Satisfied," 그리고 "Confessin' the Blues" 등 이 때 나온 곡은 초기 런던 앨범, 컴필레이션 앨범, 그리고 관련 부트렉 등에 흩어져 있다)

이 모든 일은 블루스 청취자의 성격이 변했다는 사실과 일치했다 -- 점차 백인들이 블루스의 버팀목이 되어갔고, 반면 젊은 흑인들은 블루스를 무시하게 되었다. 이런 변화에 걸맞게 Muddy Waters나 Howlin' Wolf
가 1960년대 중반 이후 R&B 차트에서 히트하기 보다는 대학생들에게 앨범을 팔아 Top 100 앨범 차트에 오르는 것이 더 쉬운 일이 되었다.

대부분 레코드 레이블들은 이런 변화를 받아들였지만 이를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난감해했다. 레이블들은 모든 것을 다 시도해 보았다 -- B.B.King은 사이키델릭하게 덧칠한 앨범을 내놓았고 Muddy Waters는 <MUDDY, Blues the and Brass,>에서 B.B.King 같은 사운드를 내야만 했다. Muddy Waters와 Howlin’ Wolf는 Chess의 자회사인 Cadet/Concept 레이블(Leonard Chess의 아들인 Marshall Chess가 운영했다)에서 완전히 사이키델릭한 사운드로 치장되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Leonard Chess 역시 당시 백인 청취자들의 변화를 이해하는데 늦었다. Leonard Chess는 Buddy Guy 같은 걸출한 인물의 재능을 무시했다. Buddy Guy는 화려한 스타일로 리드 기타를 쳤는데 이런 스타일은 Muddy Waters와 완전히 다르며 오히려 Jimi Hendrix, Mike Bloomfield 그리고 대학생들이 열광했던 다른 기타 연주자와 똑같은 스타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eonard Chess는 Buddy Guy가 다른 레이블과 계약할 때까지 그를 무시했다. 반대로 1950년대 Rock & Roll 음악을 많이 내놓지는 않았고, 블루스는 훨씬 적게 취급했던 Columbia Records와 Capitol Records는 정통적이며 확립된 스타일을 갖고 있는 Son House, Bukka White, Willie Dixon, 그리고 Mississippi Fred McDowell 같은 블루스 뮤지션들의 음악을 레코딩하기 시작했다. Son House의 경우, 그가 연주한지 하도 오래 되어서 미래의 Canned Heat의 공동 설립자이자 블루스 연구자였던 Alan Wilson
의 도움을 얻어 자신의 스타일에 다시 익숙해져야만 할 정도였다.

이 뮤지션들은 이런 상황 덕에 비록 서로 다른 액수이지만 돈을 벌게 되었다. Muddy Waters, Howlin’ Wolf, B.B.King, Lightnin’ Hopkins, Albert King 그리고 다른 블루스 스타들이 유럽에게 공연하기 시작했을 때 뿐 아니라(당시 공연료는 $2000가 보통이었는데 많은 것은 아니지만 미국 클럽에서 공연할 때 받았던 돈의 열 배는 족히 됐다) 미국 대학 순회 공연을 시작하자 이들의 공연 수익은 상당히 올라갔다. 20세기 전반의 상황에서 살아 남은 연주자들 일부에게 블루스에 대한 수요가 갑자기 증가하고 갑자기 돈이 쏟아져 들어오게 되는 상황이란 감당하기 힘들었다 -- Mississippi John Hurt같은 연주자의 경우, 1920년대에는 음악으로 성공한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해 보다가 1960년대 수천명의 열광적인 팬 앞에서 연주하게 되었는데, 그는 한번의 쇼로 받은 $1500의 공연료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대부분 연주자들을 이런 상황을 잘 대처하고 지난 날의 성공에 대한 뒤늦은 대가로 여겼고, Mississippi John Hurt와 Furry Lewis
처럼 40년이나 늦게 명성을 얻은 몇몇 사람들은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중요한 레코딩을 남기기도 했다.

현재로선 이들의 로열티가 지급되었을 거리고 추정된다. 미심쩍기는 하지만 말이다 -- 한가지 예로, Piano Red는 이렇게 회상한다 : 1962년 Okeh 측이 그의 히트곡 "Mr. Moonlight"가 30만 카피나 팔렸음에도 이에 대한 로열티를 전혀 지급하지 않자 Okeh에서의 그의 레코딩 활동은 정지 상태가 되어 버렸다. 몇 몇 뮤지션들, Willie Dixon과 Chuck Berry같은 저명한 뮤지션들은 변호사와 회계사를 내세워 자신들이 자신들이 받아야할만큼 돈을 받고 있는지 검증하기 시작했다. 특히 작곡의 경우엔 훨씬 더 액수가 컸다. 특히 Rolling Stones과 Cream 같은 백인 슈퍼스타들이 이 사람들의 레퍼토리를 연주하기 시작했을 땐 말이다 -- 이는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지만 결국 Muddy Waters와 Willie Dixon
은 자신들이 만든 곡의 저작권에 기반한 재정적 보장을 얻게 되었고, 곡 저작권으로 얻은 수익은 자신들의 레코딩만큼이나 많은 수익을 이들에게 가져다 주었다. 

 

 

  

Albert King - 01 -  I'll Play The Blues For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