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스

블루스 가이드 그리고 역사 3

시나브로a 2012. 6. 21. 11:04

 


Beginner's Guide and History - How to Listen to the Blues

by Bruce Eder

Blues Roots

앨범이 아닌 개별 곡이라는 것이 전통적인 블루스맨의 레코딩 경력의 중심이었고, 싱글은 일반적으로 여러 달 간격으로 출시되었다. 따라서 청취자들이 블루스맨의 음악을 접할 때는 몇 시간이 아닌 몇 년이라는 기간을 소요한 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블루스를 들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잊기 쉽다 : Papa Charlie Jackson 같은 2차 대전 이전에 활동한 연주자의 음악은 두 시간 정도 분량의 레코드에 담겨 있지만, 그는 자신의 스타일과 레퍼토리를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두 시간이 아닌 십수년 간 동안 발전시켜 왔고, Papa Charlie Jackson은 수백 곡을 연주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Papa Charlie Jackson보다 좀더 오래 살았던 Blind Willie McTell이나 Bukka White 같은 뮤지션들은 20여년간 한 번에 4곡 내지는 6곡 정도를 레코딩했다. Tampa Red는 1927년부터 1953년까지 한번에 4곡씩 300곡 이상을 레코딩했다. 한번에 앨범 하나 정도의 분량을 레코딩해달라고 요구받기 전까지 Tampa Red는 줄곧 그렇게 해왔다. Big Bill Broonzy는 최전성기에 일년에 24곡 정도를 레코딩했다 -- Big Bill Broonzy는 30년대 후반 내내 이런 페이스로 레코딩을 했다. 그러나 그런 노래들은 각각 개별 레코드에 담겼고, 대중들은 한번에 두 곡씩 들을 수 있었다.

오늘날 청취자들이 만나게 되는 블루스 뮤지션들의 곡들이 함께 묶여 있는 것인데 이런 형식이란 몇몇 제작사 측에서 이 곡들이 나온지 몇 년 혹은 수십 년 뒤에 이 곡들을 같은 컬렉션에 묶어 두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일 뿐이다 : 한편으론 청취자들이 접하게 되는 LP와 CD란 편리한 것이기도 하지만, 앞에서 본 맥락에서 본다면, LP와 CD는 원래 블루스 곡의 기원과 목적을 왜곡한다. 한 앨범에 수록된 곡들은 그냥 한 앨범으로 포장되었을 뿐 일관된 체계를 이루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첫번째 블루스 앨범이 출현하기까지 거쳐 온 변화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출발점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정의 가능한 음악적 형식으로서의 블루스는 20세기로 막 들어서는 즈음에 W.C.Handy의 음악에서 등장했다. 물론 블루스가 그 뒤 10 동안에는 상업적인 성공 가능성을 가진 쟝르가 되진 못했지만 말이다. 당시에 블루스를 연주하는 사람들은 랙타임이나 novelty song, 그리고 다른 레파토리들과 함께 블루스를 연주했던 뮤지션들이었는데 대부분 Minstrel Show(역주 : 백인들이 얼굴을 검게 칠해 흑인으로 분장하고 흑인 노래를 부르는 쇼)나 약장사들이 벌이는 쇼나 카니발에서 연주하거나 미국 최남부(역주 : Deep South - 죠지아, 앨라바마,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주)의 작은 흑인 마을에서 연주했다.

블루스는 독특한 음악이다. 블루스는 절망에서 생겨났지만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가스펠과 영가 역시 유사한 사회적 뿌리를 갖고 있다. 그러나 가스펠과 영가는 블루스와는 다르게 작용한다. 가스펠과 영가는 구원, 천벌, 우주에서 인간의 자리 등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 블루스는 지상(地上)의 문제와 관련되며 왕왕 더 초라한 모습을 띄고 있다. 더욱이 블루스는 비탄의 근원을 자세히 묘사하면서 청취자의 기분을 풀어주는 만들주는 효과가 있다 : 고양되거나,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기분을 풀어주고 언제나 더 행복하게 해 준다.

이것이 블루스가 너무 슬프고 비관적이라는 이유로 블루스를 거부하는 사람들(특히 흑인 청취자들)이 20세기 중반 가장 유명한 블루스 작곡가 Willie Dixon을 예외적인 경우로 거론하는 이유이다. 이런 사람들과는 정반대로 Dixon은 “블루스는 행복한 음악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이 참이다 -- 만일 당신이 20년대나 초기 30년대의 훌륭한 컨트리 블루스나 60년대 후반의 일렉트릭 블루스를 듣는다면 블루스에 담긴 익살, 악기와 목소리의 어울림, 그리고 이것들 모두가 어우러진 노래가 내놓는 전체적인 효과를 들으면서 행복감에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다. 심리적으로 말하자면, 블루스 곡은 번민의 피난처와 같다. 청취자나 작곡자를 번민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이건간에 말이다.

20세기 초반, 이런 사실은 전혀 미스터리가 아니었다. 레코드 회사들은 앨범을 살만한 흑인 고객층을 확인하자마자 레코드 회사들은 블루스를 쾌락이 넘치는 음악으로 간주했다. 기묘하게도 블루스가 레코드로 처음 등장한 것은 여성 블루스 싱어들이었고 이때 레코딩된 노래들은 상당히 upbeat 형식의 노래들이었다.

Mamie Smith (1883-1946)는 "Crazy Blues" 를 Okeh 레이블에서 출시하면서 “블루스”라는 용어를 1920년대 대중 음악 문화계에 소개했다. Mamie Smith가 출시한 레코드들은 한달에 7만5천 카피가 팔렸는데 당시에는 엄청난 숫자였고, Okeh 레코드는 이에 고무되어 “블루스”라는 이름을 달고 초기 블루스 사운드를 담은 레코드를 출시했다. 그러자 곧 다른 레코드 회사들 역시 Okeh 레코드의 성공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1920년 여름 즈음에 Arto에서 Lucille Hegamin이 레코딩했고 곧이어 Lillyn Brown이 Emerson에서 Alberta Hunter가 Black Swan 레이블에서 레코딩했다.

이런 레코드 모두를 “인종 음반 Race Records”이라고 부른다. “인종 음반 Race Records”라는 말은 이 레코드들이 흑인 청취자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안전하고 보다 점잖게 부르는 말이다. Okeh는 이런 이름으로 시작했다 -- Okeh는, 미국에서 어느 정도 청취자를 가질 수 있는, 모든 지역의 민속적이고 대중적인 음악이랄 수 있는 상당수의 음악을 레코딩했다. 그러나 Okeh는 그들이 “인종 음반”이라는 이름을 걸고 등장하기 전까지는 흑인 청취자를 위한 음악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주저하곤 했다. 그리고 “인종 음반”이란 이름은 40년대 후반까지 음반 산업에서 계속 사용되었다.

그런데 스타일에 있어 가장 초기에 널리 수용된 블루스 레코드는 1923년 발매된 Bessie Smith'의 “Down Hearted Blues”였다. 이 시기에 레코딩한 남성 블루스 싱어들도 있었다. 기타 연주자 Sylvester Weaver 그리고 가수 겸 기타 연주자 Ed Andrews 같은 사람들로 Ed Andrews는 1924년 "Barrelhouse Blues"라는 곡을 내놓은 바 있다. 그러나 히트곡을 내놓으면서 실질적으로 블루스 시대를 열어 놓은 사람은 Papa Charlie Jackson (c. 1885-1938)이었다. 그는 당시 "Papa's Lawdy Lawdy Blues"와 "Airy [aka "Hairy"] Man Blues" 같은 곡을 내놓았다. 얼마 후 Cannon's Jug Stompers의 리더였던 Uncle Gus Cannon (aka "Banjo Joe") (1885-1979)가 첫번째 레코드를 내놓았다 -- 훗날 Grateful Dead의 몇몇 노래는 Uncle Gus Cannon의 곡에 뿌리를 두고 있다.

Papa Charlie Jackson의 1924년 레코딩은 Wisconsin Chair Company의 자회사로 뉴욕에 근거하고 시카고에서도 레코딩 작업을 했던 Paramount 레이블에서 나왔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초기에, Okeh 외에, 블루스를 취급한 메이저 레코드 회사로는 Victor, Vocalion, 그리고 ARC (American Record Company)가 있다. 이 시기의 레코딩은 약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잦았는데, 특히 시골 환경에서 그대로 레코딩하는 경우가 많았다 -- 먼저 연주자들이 모일 시간과 장소(보통은 해당 지역 호텔)를 미리 공지하고나서 레코드 회사의 대리인이 아틀란타 같은 도시에 찾아가거나 레코드 회사의 대리인이 town이나 작은 흑인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그 지역에 재능있는 뮤지션의 음악을 들어보고나서 시골 잡화점에 장비를 벌여 놓고 레코드 회사의 대리인에게 좋은 반응을 이끌어낸 사람의 음악을 녹음을 했을 것이다. (주 : 이런 장면은 미국 대중 문화의 마이너 쟝르에서만 대충이나마 재현되었을 뿐이다 -- 1962년 Andy Griffith Show의 에피소드 "Mayberry on Record"는 한 레코드 회사의 스카우트를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레코드 회사의 스카우트는 Mayberry에 나타나 오디션을 주관하고 그 지역에서 음악에 재능 있는 뮤지션의 음악을 녹음한다 --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연찮게 Kentucky Colonels 같은 bluegrass(미국 남부의 컨트리 음악) 그룹도 만나게 된다)

이 시대 최고의 블루스맨들은 수백곡에 이르는 레퍼토리를 갖고 있었고 언제나 청중을 휘어잡을 수 있는 곡도 몇 곡씩은 갖고 있었다. 유망한 곡 하나만이라도 있는 블루스맨이라면 레코딩해 볼 기회는 있었다 ; 많은 뮤지션들이 첫번째 두 곡을 녹음하는 한 번의 세션 또는 여덟 곡이나 열 곡을 녹음하는 세 번의 세션을 넘기지 못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Big Bill Broonzy와 Tampa Red 같은 사람들은 25년 동안 수백 곡을 작곡하고 레코딩해서 각각 시디 한 12장 정도는 거뜬히 채울 정도였다.

레코드 회사의 심사를 통과한 가능성있어 보이는 뮤지션들은 보통 그 자리에서 계약을 맺었다. 레코딩은 아주 도박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 마이크는 조잡했고 소리를 제대로 잡아낼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경우가 많았으며 레코딩 테이프는 있지도 않았다. 당시 레코딩 과정은 포터블 녹음장비(무게가 몇 백 파운드 정도 나갔다) 위에서 뜨거운 왁스 상태의 락커를 잘라내는 것이었다. [뭔 말인지 모르겠음T_T] “플레이백(역주 : 갓 녹음한 레코드의 재생)”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다. 플레이백은 락커를 손상시키기 때문이었다 -- 몇 개월 뒤 프레싱 작업이 들어가기 까진 오류를 체크할 방법이 없었고, 제한된 시간과 자금 밖에 없는 뮤지션과 프로듀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해야 녹음이 됐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 뿐이었다.

때때로 당시 아주 운좋고 야심있는 프로듀서들은 블루스의 전설적인 거목들을 함께 레코딩하여 역사적인 결과를 얻어내기도 했다 -- 20세기 전반 최정상급 기타 연주자들인 Papa Charlie Jackson과 Blind Arthur Blake는 "Papa Charlie and Blind Blake Talk About It - Parts I and II"라는 레코드를 내놓았고, Jackson은 Hattie McDaniel와 듀엣으로 "Dentist Chair Blues - Parts I and II"를 내놓았는데, 이는 Hattie McDaniel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오스카 상을 타기 수십년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John Lee) Sonny Boy Williamson의 가장 초기 레코딩에는 블루스 만돌린 스타 Yank Rachel을 비롯해 Robert Lee McCollum (aka Robert Nighthawk)와 Big Joe Williams같은 뮤지션들이 함께 참여했다.

블루스 레코딩 과정에 많은 제약이 있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쉽게 잊어 버린다. 모든 레코딩은 78회전 디스크에 담겨 출시되었는데, 78회전 레코드는 한 면에 최대 3분 남짓한 정도의 런닝 타임을 갖고 있었다. 이런 사실은 블루스 연주자에겐 레코드에 맞추기 위해 연주를 줄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의 78회전 레코드에 비추어 볼 때, 블루스 연주자들이 일반적으로 연주하던 6분 내지는 7분 정도 길이의 곡은 그림자에 불과했다 -- Leadbelly는 1948년 레코딩 테이프에 녹음된 첫번째 세션(그의 레코딩 경력의 가장 후기에 해당한다)을 벌이기 전까지는 자신의 곡을 레코드에 맞도록 줄이느라 항상 고심해야 했다. 드물게는 곡이 아주 매력적이어서 프로듀서가 한 곡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레코드의 양면에 수록하는 경우도 있었다 -- 블루스 최고 명반 중 하나인, 20년대 후반 Victor에서 나온 Furry Lewis의 대서사시 "Casey Jones”는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데, 역시 아주 드문 경우일 뿐이다.

당시 초기 레코딩이 이루어진 계약 조건은 현대적 기준으로 볼 때엔 “약식/비공식” 계약이었다. 레코딩에 참여한 사람들 일부의 회상에 따르면, 당시 뮤지션들이 받은 급료는 50달러에서 100달러 정도와 4곡이나 6곡을 녹음하는 오후 레코딩 세션을 진행할 때 제공했던 진이나 버번이 전부였다. 로열티는, 로열티가 계약의 일부였다면 아주 드문 경우였겠지만, 거의 지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뮤지션이 자신의 창작곡에 저작권을 행사하는 것에 관심을 보인다고 해도 당시에는 레코드 판매에 대한 로열티를 거두어들일 방법이 거의 없었다.(여기에 주목해볼만한 예외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바로 Big Joe Williams였다. Big Joe Williams는 "Baby Please Don't Go”에 저작권을 설정할 정도로 선견지명이 있었고 1960년대 락과 블루스에 저작권 설정은 표준적인 일이 되고 나서 그는 "Baby Please Don't Go”에 설정한 저작권 덕에 수입이 꽤 좋았다)

레코드를 파는 일은 위와는 또 달랐다. 레코드 판매점이 존재했지만 초기 레코드 판매점은 78회전 레코드 뿐 아니라 낱장 악보와 심지어는 piano rolls까지 팔고 있었다. 레코드는 낱장 악보보다 덜 중요했고, 이런 판매점에서 가장 많이 쌓아 놓고 있었던 것은 클래식 음악, Tin Pan Alley 타입의 대중음악, 그리고 재즈였다. 블루스 레코드가 판매점에 있다면 변두리의 판매점일 뿐이었다 -- 뉴욕의 할렘이나 시카고의 South Side -- 변두리에선 블루스 레코드를 사려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것도 대도시에서만 그랬을 뿐이다.

다른 지역, 특히 미국 최남부에선 “레코드 판매점”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레코드는 잡화점, 가구점, 그리고 음악과 무관한 그밖의 판매점에서 팔았고 보통은 이런 곳이 축음기를 파는 곳이기도 했다. 음반은 고르게 배포 되지도 않았다. 같은 주의 어떤 군county에서는 살 수 있는 레코드가 다른 군county에선 살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배경에도 불구하고 20년대에 Blind Lemon Jefferson (1897-1929)의 몇 몇 레코드는 쉽게 50만장에서 백만장 정도로 팔렸다. 정말 놀라운 숫자였다.(그렇지만 Blind Lemon Jefferson은 별로 이득을 얻지 못했다 -- Blind Lemon Jefferson은 1929년에서 1930으로 넘어가는 겨울, 시카고 거리에서 얼어죽었다) 사실, Blind Lemon Jefferson의 노래 중 최소한 몇곡의 경우에는 아주 많이 팔려서 락커 마스터(역주 : 아마 카피를 만드는 원판으로 추정됨 -_-;;)가 다 닳아 없어질 정도였고, 이 때문에 Blind Lemon Jefferson은 이 노래들을 재녹음했다. 게다가 빈곤한 남부 농촌이나 북부 도시의 게토가 상대적으로 고립된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20년대 블루스 청취자들은 아주 세련된 입맛을 갖고 있었고 이들이 전기 녹음과 같은 것을 떠들어대는 광고에 충분히 반응하리라고 예측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 덕에 Paramount는 1925년 전기 녹음이 등장하자 이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주 : 전기 녹음이란, acoustic recording horn과는 반대로, 소리를 증폭할 수 있는 전기 마이크를 통해 레코딩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Paramount 레코드는 레코드의 음악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수량 이상으로 판을 팔아치우는 수상한 판매 수완이 있었다. Paramount에서 찍어낸 78회전 레코드는 잡음이 많고 최상의 환경에서도 쉽게 마모되곤 했는데, 이 회사의 레코드에는 스크래치가 있었고 아주 싸구려로 찍어내서 대여섯 번만 틀어도 마모되기 시작하곤 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청취자들은 Paramount에서 나온 앨범 중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다시 구매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는 오늘날 상태 좋은 Paramount 레코드를 구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Charlie Patton, Papa Charlie Jackson 그리고 Blind Lemon Jefferson와 같은 Paramount 소속 뮤지션의 음악 모두는 디지털로 옮길 때 알아 들을 수 있으려면 노이즈 제거를 엄청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Blind Lemon Jefferson, Papa Charlie Jackson, the Beale Street Sheiks (aka Frank Stokes and Dan Sane) 그리고 Charlie Patton (1887-1934) 같은 Paramount 소속 뮤지션들의 complete work를 재출시하려는 노력은 좌절해 왔다. 현재 최고의 디지털 클린업 작업으로도 작은 성과를 이룰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Shellac 디스크는 깨지기 쉬웠고 1950년대까지는 블루스의 역사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사람이 없었으니 이런 디스크들이 희귀하리라 것는 뻔한 노릇이다. 현재 78회전 레코드가 별로 남아 있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이 Paramount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회사 소속의 뮤지선들의 레코드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화낼 만한 노릇이다.

Blind Lemon Jefferson의 성공을 필두로 1920년대 후반 블루스 레코드 판매는 증가 일로에 있었고, 프로듀서들과 스카우트들은 Blind Lemon Jefferson와 같은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재능있는 뮤지션을 찾아 미국 남부를 헤맸다. 불행히도 대공황과 함께 이 모든 것은 멈추고 말았다. 대공황이라는 경제적 격변은 미국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남부 농촌을 강타했다. 1930년대 초반 Paramount 레코드는 파산했다 ; 1930년대 끝자락에 American Record Company는 Columbia 레코드에 넘어갔다 ; 그리고 Okeh도 Columbia 레코드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1931년 이후 Mason-Dixon Line(역주: Maryland주와 Pennsylvania주의 경계선으로 남부와 북부의 경계선임)을 넘어 갔던 레코드사 스카우트는 거의 없었다.

스카우트들이 사라짐에 따라 지방의 새로운 재능 있는 뮤지션을 발굴할 수 있는 기회도 제약되었다. 그리고 이런 사정은 블루스를 포함한 레코딩 활동 일반을 침체 상태로 만든 다른 일련의 사건과 함께 일어났다. Paramount 같은 레코드 회사들이 지불 불능 상태로 빠져들었다는 사실은, 이런 레코드 회사들이 살아 있을 때 유지했던 착취 관행과 맞물려서, 수많은 블루스 뮤지션들로 하여금 레코딩 자체를 신뢰하지 않게 만들어 버렸다. 1930년대 후반에도 여전히 활동하던 최고 연주자들 중 일부는 자신의 레코드가 아무리 성공을 거두더라도 금전적인 보답은 거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 어떤 사람들은 가난해지는 것 외에 다른 가망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의식했고, 다른 어떤 사람들은 다른 무엇을 하건 음악을 하는 것이 더 나은 삶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계속 레코딩하고 연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