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ginner's Guide and History - How to Listen to the Blues by Bruce Eder
Evolution: The 194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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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ind Willie McTell |
Curley Weaver |
Blind Willie McTell와 Curley Weaver 같은 일부 어쿠스틱 컨트리 블루스 뮤지션들은 30년대 후반까지 레코딩을 했지만 시대의 변화는 이런 종류의 블루스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고, 동시에 미국 남부의 인구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대공황은 남부의 극빈층 흑인들이 겨우 먹고 살기 위해 매달려 있던 일자리를 모조리 없애 버렸다. 흑인들의 북부 이주는 이미 1910년대에 시작되었고, 1920년대에 시카고, 뉴욕에는 상당한 규모의 흑인 사회가 형성되어 시카고와 뉴욕은 많은 블루스 레코딩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었다. 대공황은 단지 북부 이주를 더 절박한 것으로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시카고, 뉴욕 그리고 다른 북부 도시에서 흑인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블루스를 듣는 사람도 바뀌게 되었다. 빅 밴드 재즈와 유사한, 새롭고 보다 정교한 블루스가 어쿠스틱 컨트리 블루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중반 즈음 농촌의 어쿠스틱 블루스는, 청취자들의 경제적 상황의 변화와 맞물려, 쇠락하고 있었다.
레코드 회사들은 이런 부드럽고 도회적인 블루스가 어쿠스틱 블루스보다 그들의 레코드 목록과 레코딩 스케쥴에 짜 맞추기 더 쉽다는 것을 알아치리게 되었다 - 30년대 후반과 40년대 초반의 “블루스”는 스윙 오케스트라가 남긴 자취의 한 분파가 되었고 좀 더 거칠고, 시골스러운down-home 소리를 내며 가사가 재즈보다 더 저속한 경향을 띈다는 점을 제외하곤 재즈와 거의 비슷해졌다 : 사실 이들 중 일부는 일이십년 뒤에 등장한 락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Tampa Red와 Big Bill Broonzy 같이 솔로 어쿠스틱 연주자로 출발한 뮤지션들이 어느날 갑자기 6인조 내지는 그보다 더 큰 밴드의 리더가 되어 “컨트리하지 않은” 음악을 연주하게 되었다. T-Bone Walker (1910-1975) --재즈 팬들은 블루스 팬들만큼이나 T-Bone Walker를 사랑했다-- 의 블루스 레코드에서 처음 등장한 일렉트릭 기타의 발전은, 1940년대 들어서, 이런 변화를 가속시켰다.
이런 사운드가 퍼져나가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은 프로듀서인 Lester Melrose일 것이다. Lester Melrose는 1930년대 초반 Vocalion 레이블에서 일하기 시작해서 몇몇 레이블을 옮겨 다녔다. 40년대 초기 Lester Melrose는 Victor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고, Victor에서 Lester Melrose는 Bluebird 레이블의 수많은 계약을 이루어냈다 -- 사람들은 Lester Melrose를 "Bluebird beat"의 책사라고 불렀다. Lester Melrose가 동시에 여섯 명의 연주자를 순환하도록 하는 체계를 고안해 냈기 때문이었다. Lester Melrose가 고안한 체계에 따라 여섯 명의 연주자는 각기 서로의 레코드에 참여해 연주했다. 이는 그가 레코딩한 작품들의 높은 완성도를 보장했지만 -- 이런 사운드에 대한 비판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Lester Melrose가 프로듀스한 많은 레코드들은 사운드가 똑같았다. 특히 Lester Melrose가 이 여섯 명의 연주자들에게 다른 연주자의 곡을 레코딩하게 할 때는 정말 똑같았다. 물론 오늘날 이를 알아차리려면 해당 레코드들을 비교해 가며 들어 봐야만 하지만 말이다.
Lester Melrose가 프로듀스한 레코딩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Lester Melrose는 Votor의 경쟁사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작은 밴드 규모로 만들어낸 블루스는 블루스의 거친 부분을 부드럽게 다듬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을 뿐 아니라, 프로듀서와 레이블로서는 40년대 초기부턴 당시 남아 있던 스윙 밴드의 음악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40년대 중반 즈음에는 블루스엔 심할 정도의 구태의연함과 의욕 상실이 스며들었다. 시장의 포화 상태가 됨에 따라 판매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과로 드러났듯이, 이런 블루스는 청취자들에게 환영받지도 못했다.
이런 상황에 대해 Victor와 Columbia (Columbia는 American Record Company와 Okeh label를 흡수했다) 같은 메이저 회사들은 블루스 노래나 블루스 세션의 숫자를 줄이는 것으로 대응했다. Tampa Red는 30년대 중반이후 Victor에서 1년에 26곡 정도까지 레코딩하곤 했지만, 1940년대 후반에는 일년에 한두 번 스튜디오에 가서 몇 곡 레코딩하는 것이 전부였을 뿐이었다. 1940년대말에는 어느 레이블도 블루스를 취급하지 않았다. 1951년 이런 상황에서 새로이 RCA와 계약했던 Piano Red (aka Willie Perryman)가 RCA 사상 처음으로 팝 차트에 오른 첫번째 블루스 뮤지션이되고 당시에 내놓은 "Red's Boogie", "Rockin' with Red", "Right String but the Wrong Yo Yo", 그리고 "Layin' the Boogie" 같은 곡들로 한동안 RCA 레이블에서 가장 많은 레코드가 팔린 뮤지션 중 한 사람이 됐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그러나 여전히 메이져 레이블들은 R&B와 블루스에 대해서만큼은 혼란상태에 있었다. 오히려 블루스 음반을 사는 사람에게 더 가까이 있던 것은 독립 레이블이었고, 이런 현상은 1946년부터 1950년대 말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블루스가 시장에서 거의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1940년대에는 블루스 업계에 약간의 수요는 존재했다.
로열티가 뮤지션에게 지급될 때, 뮤지션에게 지급되는 로열티는 적당한 정도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로열티라는 개념은 최근에 와서야 이해되었다. 비록 프로듀서들이 로열티를 최소한 작게 하려고 조치를 취해 놓긴 했지만 말이다. Lester Melrose를 통해 Victor의 Bluebird와 계약했던 Arthur Crudup은 자신의 계약 조건이 자신이 받을 음반 판매 수익을 빼앗아가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1940년대 그의 레코드가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그에게 떨어진 로얄티는 거의 없었다. 1960년대 Arthur Crudup이 재조명되고 자신의 음악과 연주에 걸맞는 정도의 수입을 얻기 시작한 뒤에도, Arthur Crudup는 절망에 빠져 있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나는 가난하게 태어났고, 가난하게 살았지. 그리고 나는 가난하게 죽게 될거야.”
이제 누군가 이렇게 물을 것이다 : 이것이 모두 사실이라면 왜 연주하고 음악을 만들었던 걸까?
한 가지 대답은 이런 것이다 : 그래도 음악이 중요했다 ; Crudup, Blind Willie McTell, Buddy Moss, 그리고 Skip James같은 사람들, 이들은 자신이 사기당하고 착취당해왔으며 어쩌면 보다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강탈당해왔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래도 음악은 그들 마음 깊숙한 곳의 기쁨을 주었다.
그래도 그들은 계속 블루스를 연주했다. 아마도 자신들의 음악이 블루스였기 때문일 것이다 -- 그리고 Willie Dixon의 말이 옳다면, 블루스는 슬프게 들리지만, 당신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행복”이란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만족감이며, 이 뮤지션들이 무언가 할 이야기를 품고 이렇게 살아왔음을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음악, 삶이 그들에게 어땠는지에 관해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음악, 바로 이런 음악을 가지고 무언가를 했다는 만족감을 의미할 것이다 ; 수입은 너무 적게 손에 들어왔고, 실제로 도움이 되기에는 너무나 늦게 들어왔다. 그러나 흑인이건 백인이건, 사람들은 그래도 블루스를 들었다. 더구나 이런 뮤지션 중 일부는 그저 음악이 좋아서 자신이 사기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블루스를 연주했다 -- Piano Red의 "Right String but the Wrong Yo Yo"는 최소한 세 차례나 히트했지만, Piano Red는 레코딩 뮤지션으로 거둔 성공에 대한 아무런 금전적 보상도 받지 못했다 ; 한편 작곡자로서 받은 돈에 대해서도 수십년간 신경쓰지 않았다.
작곡자들에게도 상황은 더 낫지 않았다. 그러나 1939년 Broadcast Music Incorporated (BMI)이 설립되자 미래에라도 작곡자들이 좀 더 나은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는 수단이 마련되었다. Broadcast Music Incorporated (BMI)는 작곡자들의 로열티 수익을 감독하는 권리 행사 기구였다. 그때까진 이런 일을 하는 기구는 ASCAP(American Society of Composers, Authors, and Producers) 뿐이었다. 수십년간 ASCAP은 소속 작곡자들이 곡의 판매와 방송에 대해 수익을 올리도록 해 왔다. 그러나 ASCAP는 상류층 클럽처럼 운영되는 조직이었고, Broadway, Tin Pan Alley, 클래식, 좀 세련된 재즈 등 보다 “존경할만한” 영역에 속한 사람들에 대해서만 대해서만 가입을 허용했다. 블루스 곡을 작곡하는 사람은 가입이 거의 불가능했다.
BMI는 컨트리&웨스턴, hillbilly, 재즈, 블루스 작곡가를 포함해 ASCAP에 가입하지 못했지만 훌륭한 곡들을 창작하는 모든 사람들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두 기구 사이의 경쟁은 아주 치열해서 초기엔 두 기구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고, 1940년대 초기엔 ASCAP의 곡 전체가 방송에서 사라질 정도였다. 뒤에는 다소 적절한 타협이 이루어져 BMI는 확고히 자리잡고 인정을 받게 된 후에도 ASCAP는 가입을 제한하는 상태로 그대로 남아있게 되었고, 그리고 ASCAP는 꽤 오랜 기간 두 기구 중 상위 기구로 간주되었다. (주 : 이는 다음과 같은 편견 때문이었다 : 회원수나 수익에서 ASCAP에 뒤쳐져 있던 BMI가 50년대 중반과 후반 컨트리&웨스턴과 블루스의 소산인 락앤롤이 방송과 레코드 판매를 지배하게 되자 오래된 라이벌에게 갑자기 도전해 왔다 ; 대부분의 락앤롤 작곡자들은 BMI의 회원이었다. 이는 락앤롤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BMI를 공격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ASCAP가 관리하는 좋은 음악보다 “질이 낮은” 락앤롤 음악을 대중에게 퍼뜨린다는 것이 이유였다)
마침내 BMI의 설립과 더불어 블루스 작곡가를 위한 기구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BMI가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탐욕스러운 프로듀서들은 소속 뮤지션들이 발행권을 양도하도록 했고, 발행자들도 작곡자를 속이려고 레코드회사와 짜고 일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소한 작곡으로 돈을 벌 수 있게 하는 메커니즘은 존재하게 되었다.
어떤 뮤지션들은 작곡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보호해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이 장래에라도 잘 살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였다. 이렇게 한 가장 최초의 사람 중 하나가 Hudie Ledbetter라고 불리기도 한 Leadbelly였다. Leadbelly는 포크송 수집가였던 John Lomax와 그의 아들 Alan이 루이지애나 교도소 농장에서 “발굴”해낸 뮤지션이다. 그는 Lomax 부자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풀려나 상업적인 레코딩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아마도 John Lomax와의 만남 덕에 Leadbelly는 작곡의 사업적 이익에 대해 이해하고 이익을 얻게 된 첫번째 블루스맨 중 한 사람이 되었다. Lomax는 Leadbelly에게 사업에 관한 모든 부분을 보여줄 때 호의로 가득 차 있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뮤지션 발굴에 대한 경력과 지위를 보장받으려고 노력하는 와중에, Lomax는 수많은 Leadbelly의 곡을 자신과 Leadbelly 양쪽으로 저작권을 설정했고 이렇게 해서 자신이 로열티 일부를 차지하도록 해 놓았다. 결국 싱어/기타리스트였던 Leadbelly는 같은 시대의 다른 어느 블루스 작곡가들보다 작곡의 사업적 측면을 잘 이해하고 있는 채 뉴욕에 도착했다. 비록 Leadbelly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로 인해 혜택을 입을 정도로 오래 살지는 못했지만, 그의 미망인은 팔자를 고칠 정도의 인세 수익을 얻게 되었다.
Big Bill Broonzy 역시 저작권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연주자/작곡자였지만, 자신의 작품에 대한 권리를 보호할 실제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의 청취자 뿐 아니라 동료 뮤지션에게 블루스 작곡자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의 세대 다른 뮤지션들의 권리가 보장되도록 확립한 사람은 바로 Willie Dixon이었다.
십대 시절부터 작곡을 계속 해 온 -- 십대시절에도 Willie Dixon은 자신의 곡을 여러 지역 밴드에게 팔곤 했다- 타고난 작곡가 Willie Dixon은 40년대 초기에 곡의 저작권의 중요성에 대해 알아채고 있었다. 비록, Willie Dixon과 Chess레코드와의 관계의 일부로서, Chess 레코드의 출판 자회사였던 Arc Music과 계약하는 것으로 끝내기는 했지만, Willie Dixon은 자신이 작곡한 곡들에 대해 눈을 뗀 적이 없었다. 1970년대 전투적인 매니저의 도움을 받아, 1940년대 작곡한 수많은 곡에 대한 28년 계약 갱신이 다가오자 Willie Dixon은 자신의 곡에 대한 소유권을 선언하고 자신의 수많은 히트곡에 대한 경제적 이익을 요구했다. Willie Dixon은 블루스 분야에서 작곡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인 첫번째-혹은 아마 보다 정확하게는 가장 나이든-작곡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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