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스

슬픔에서 기쁨까지 / "재즈"라는 문화

시나브로a 2012. 6. 21. 10:21

 

 

슬픔에서 기쁨까지 / "재즈"라는 문화

 

 

지금은 다소 그 열기가 시들해졌지만 한때 우리는 "재즈"에 취해 몸살을 앓았다. 한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차 인표라는 잘생긴 남자 주인공이 곧잘 재즈 바를 찾아 색소폰을 연주하는 모습이 방송되고부터 우리 주변에는 재즈가 흘러 넘쳤다.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재즈 카페는 꽤 많은 젊은이들로 북적거렸고 커피 전문점이나 미용실, 심지어 새로 생긴 분식집, 룸 살롱에서 내세운 이름도 "재즈"였다.

주요 소비 계층으로 떠오른 젊은 층을 겨냥한 텔레비전 광고를 비롯한 여러 상품 광고에도 재즈가 홍수를 이루었다. 패션 쇼를 열며 내거는 주제는 물론이고 화장품과 음식의 이름에까지 재즈가 등장했다. 좋든 싫든 간에 우리는 "재즈를 입고 재즈를 바르고 재즈를 먹게" 되었다.

 

이렇듯 보통의 사람들이 재즈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 나라의 소득 수준이 만 달러를 넘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정치적 안정과 개인의 인권이 존중되는 민주사회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다. 그것은 문화적 욕구가 높아지면서 아울러 음악에서 무언가 색다르고 고급스러운 것을 찾을 때 선택되는 것이 재즈이기 때문이다. 자유 분방한 음악적 색깔과 강한 개성이 자기만의 독특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취향과도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천구백구십년대 중반 거품 경제가 한창일 때 우리 나라에도 재즈의 열기가 빠르게 퍼져 나갔음을 돌이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재즈 붐에는 거품 같은 허망함이 느껴진다. 왜냐하면 경제 사정으로 실질 소득이 떨어진 지금 재즈가 설 땅이 흔들리고 있기도 하거니와 그보다 우리 나라의 재즈 붐에는 음악의 내적 발전보다는 소비 문화를 내세운 외적인 유행이 더 앞선 까닭이다.

 

재즈, 무한한 자유를 꿈꾸며

 

그러면 재즈란 도대체 어떤 음악인가?

"신세대 문학의 기수"라고 불리는 작가 장 정일은 한 여자 잡지에 그이의 소설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를 연재하면서 자신의 소설에 관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설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에서는 불규칙 화음과 반복되는 장식음의 변주, 즉흥적인 돌발성 들을 특징으로 하는, 재즈 음악과 같은 글쓰기가 실험되고 있습니다. 이번 소설에서 제가 시도하고 있으며, 독자 여러분을 상당히 당황하게 하고 있는 재즈적인 글쓰기의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그는 성냥으로 담뱃불을 붙이고 라이터를 탁자 위에 놓았다"는 식의 문장이 그런 것이지요.
- <장 정일의 독서 일기>(범우사)

 

이 말에는 재즈의 특징이 잘 간추려져 있다. 재즈의 가장 큰 특징을 이루는 "자유"라는 부분을 잘 꿰뚫고 있는 것이다. 이 "자유"의 정신은 재즈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이며 재즈를 이루고 있는 가장 기본적 요소이기도 하다.

 



Trumpeter and singer Louis Armstrong, a well-known jazz musician

 

 

재즈의 특징은 즉흥성을 중요시하는 연주 스타일과 연주 그 자체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사람이 같은 곡을 연주해도 분위기와 기분에 따라 연주가 달라진다. 그러므로 재즈에는 "절대성"이라는 것이 없다. 여기에 재즈의 묘미가 있다. 곧 개인의 취향에 따라 끝없이 자유로워질 수 있고, 때로는 어울리지 않는 불협 화음도 아름답게 들릴 수 있다. 이것은 기존 멜로디의 해석, 새로운 멜로디의 전개, 자신의 감정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연주자의 능력에서 나온다. 그런 까닭에 재즈만큼 개인이 하는 구실이 큰 자리를 차지하는 음악도 드물다.

 

그룹이 연주를 할 때는 솔로 연주자뿐 아니라 구성원 전원이 애드립(즉흥 연주)을 한다. 애드립 경연은 다른 장르의 음악에서는 볼 수 없는 재즈만의 진풍경이다. 트럼펫, 색소폰, 피아노, 드럼 들이 함께 어우러지다가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솔로로 전면에 나와 즉흥 연주를 하는 모습은 재즈의 진가 가운데 진가이다. 애드립은 자칫 개개인의 경쟁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엄연히 질서가 있다. 이렇게 개개인의 음악적 감각과 개성이 구성원들을 통해 조화를 이룰 때 연주자 자신들도 상상하지 못하는 예술적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놀라운 면을 재즈는 가지고 있다.

 

재즈는 흑인 노예들이 그이들의 고통스런 현실을 한탄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가스펠과, 한 맺힌 가슴 깊은 곳에서 비집고 올라오는 블루스에서 출발한 것으로 결코 가볍게 다가갈 음악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 역사적 변천 과정을 이해하고 기본적인 장르를 파악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것을 통해 왜 많은 사람들이 재즈에 대해 탄복과 사랑을 금치 못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재즈가 어려운 까닭은 소비 지향적인 음악이 아니고 음악의 본질, 삶의 진실을 담으려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이 어려운 예술은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약간의 어려움을 요구한다. 그 대신 다른 음악에서는 느낄 수 없는 진정한 희열과 즐거움을 보상으로 가져다 준다.

 

Reggie Workman, Pharoah Sanders, and Idris Muhammad, c. 1978

 

 

이제 재즈와의 행복한 만남을 위하여 여행을 떠나 보자.

 

미국의 술집이나 무도장에서 연주되던 래그타임

 

재즈라는 거대한 장르를 이야기하기 전에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래그타임이다. 래그타임은 천팔백칠십년대부터 미국의 술집이나 무도장 들에서 연주되던 흑인 피아니스트들의 연주 스타일이다. 미주리 주의 세달리아와 세인트루이스를 중심으로 발달한 래그타임은 즉흥 연주가 아닌 작곡된 악보에 의해 연주되었다. 이것은 십구 세기 유럽의 피아노 음악의 전통을 바탕으로 작곡되었기에 미뉴에트의 트리오 형식과도 꽤 가까운 관계가 있다. 래그타임은 천구백년대 초반에 걸쳐서 확립되었고 음악적 특징은 행진곡풍으로 사분의 이 박자에 세 단락으로 나누어진다.

 

피아노에서 왼손의 반주부는 보통 두 박자의 화음을 정규적으로 연주하고 오른손은 날카로운 싱커페이션(당김 음) 형태의 오프비트(강세를 붙이지 않은 박자) 멜로디를 연주했다. 또한 오른손 연주는 분산 화음(연속적으로 연주하는 주법) 스타일의 연주를 했는데 이는 기타와 밴조의 연주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래그타임은 비록 댄스 음악의 장르에 속하기는 했으나 스콧 조플린 같은 래그타임의 대부에 의해 모차르트나 쇼팽의 그것처럼 고전적인 아메리칸 피아노 스타일로 인정을 받았다.

초기 래그타임은 상스럽고 추한 니그로 음악이라 하여 냉대와 멸시를 받았다. 그럼에도 전 세계로 빠르게 퍼져 나가면서 놀랍게도 클래식의 거장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스트라빈스키는 <래그타임>과 <피아노 래그 뮤직>을 작곡했고

드뷔시는 자신의 작품에 래그타임의 리듬과 싱커페이션을 도입했다.

래그타임은 제일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전에 차차 자취를 감추는 듯했으나 그 뒤 영화나 텔레비전의 쇼 프로에서 면면히 그 맥을 이어 가고 있었다. 영화 <스팅>의 주제곡으로 사용되어 전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엔터테이너>가 바로 스콧 조플린의 래그타임이다. 그리고 천구백칠십년대 초 조슈어 리프킨의 음반에 조플린의 래그타임이 삽입되어 빌보드 싱글 차트 히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조플린의 래그타임은 영화 음악으로 각색되어 두 번이나 아카데미 영화 음악상을 받는 진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와 같이 래그타임은 재즈라는 장르가 생기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전설적인 음악이면서 현대 대중 음악에도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살아 있는 음악인 것이다.

 



(front, left to right) Tony Sbarbaro (aka Tony Spargo) on drums; Edwin "Daddy" Edwards on trombone;

D. James "Nick" LaRocca on cornet; Larry Shields on clarinet, and Henry Ragas on piano. From a 1918 promotional postcard while the band was playing at Reisenweber's Cafe in New York City.

 

 

장례식 때 연주되던 뉴올리언스 재즈

 

뉴올리언스는 맨 처음 스페인 사람들이 차지했었으나 십칠 세기 후반 프랑스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개척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이 넓은 지역을 루이 십사세의 이름을 본떠 "루이지애나"라고 하였고 오늘날 뉴올리언스라 불리는 도시를 오를레앙을 본떠 신 오를레앙이라 하였다.

 

오늘날 루이지애나 주는 뉴올리언스를 포함하는 남부의 작은 주로 한정되어 있지만 당시는 캐나다 국경에 위치한 커다란 지역이었다. 천칠백십팔년 프랑스 사람들이 세운 이 도시는 천팔백삼년 미국의 제삼대 대통령인 제퍼슨이 나폴레옹으로부터 천오백만 달러에 사들이기 전까지는 프랑스 사람들이 통치하고 있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그이들의 문화를 곳곳에 가득 뿌려 놓았다. 이 곳에 남겨진 스페인, 프랑스 사람과 흑인의 혼혈을 크리올이라고 했는데, 재즈가 생기기까지 이 크리올이 한 구실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흑인 특유의 감수성으로 유럽 음악을 래그타임 음악과 접목하는 중요한 노릇을 했다. 남북 전쟁 뒤 크리올은 거개가 흑인 빈민가로 흘러 들어갔다.

 

이십 세기 초 뉴올리언스의 장례식에서는 음악이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었다. 장례식에서 가장 중요한 절차가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과정이었다. 그때 행렬이 연주하던 음악은 갈 때와는 달리 슬픔을 달래듯 즐겁고 활기에 넘쳤는데 이로써 슬픔을 거두고 본래의 생활로 돌아가려는 그이들의 의지를 담고 있었다. 이 장례식은 프랑스에서 유래된 것으로 지금도 남부 프랑스에는 이러한 관습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이 장례식의 밴드가 재즈 밴드의 처음이다.

 

남북 전쟁이 끝난 도시에는 전쟁에서 진 남군의 군악대가 남긴 많은 악기들이 있었다. 자유인이 된 흑인들은 싼 값으로 악기를 사서 브라스 밴드를 만들었다. 이 흑인 브라스 밴드가 없었다면 재즈라는 것이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미시시피 강 하류에 자리잡은 항구 도시 뉴올리언스는 사람들로 넘쳐 났고 도시는 날로 활기를 더해 갔다. 홍등가인 스토리빌이 흥청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에 음악이 빠질 수 없었다. 당시 유명한 연주자들로는 젤리 롤 모튼, 킹 올리버, 버디 볼든, 프레디 케퍼드 들이 있다. 이 무렵의 연주 스타일을 음악인들은 "재즈"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뉴올리언스 재즈와 함께 딕시랜드 재즈가 미국의 남부에서 태어났다. 딕시란 미국 남부 지방을 일컫는 말이고 딕시랜드는 뉴올리언스와 그 주변의 늪지대를 가리킨다. 딕시랜드 재즈는 뉴올리언스의 재즈보다 늦은 때인 천구백십년대 이후에 생겨났다. 처음에는 흑인 재즈맨들의 연주도 포함해서 딕시랜드 재즈라고 했으나 천구백이십년대 이후부터는 남부 백인들에 의해 시도된 재즈를 딕시랜드 재즈라고 했다.

 


Paul Whiteman and his orchestra in 1929. Paul Whiteman was a popular orchestra leader

 

 

흑인 이주민들에게서 전해 온 시카고 재즈

 

천구백십칠년 뉴올리언스 재즈 연주자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공창가 스토리빌이 없어졌다. 일자리를 잃은 재즈 연주자들은 배를 타고 미시시피 강을 거슬러 시카고의 환락가로 스며들었다. 결국 스토리빌의 폐쇄는 뉴올리언스나 딕시랜드 같이 남부 시골에서 생긴 재즈가 대도시로 흘러 들어 더욱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천구백이십년대는 미국의 산업 구조가 농업에서 공업으로 바뀌어 가고 있을 때였다. 많은 이들이 북부의 공업 도시로 옮겨 갔고 흑인들은 뉴욕을 피해서 시카고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뉴욕은 남부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심한 까닭에 흑인들이 가까이하기 힘든 도시였다. 그리고 만일 실패해서 고향에 돌아갈 때 뉴욕보다 시카고가 가까워 여비가 싼 까닭도 있었다.

 

흑인들의 음악이 시카고에 선을 보이자 백인들이 댄스 오케스트라를 통해 재즈풍의 연주를 함으로써 독특한 시카고 재즈 스타일을 만들어 나갔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재즈 연주자로는 킹 올리버와 루이 암스트롱이 있다.

재즈 역사로 볼 때 가장 높이 살 만한 일을 한 루이 암스트롱은 천구백일년 뉴올리언스에서도 가장 험한 지역인 제인엘리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암스트롱은 "새치모"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멜빵 가방 입"을 줄인 말이다. 크고 두툼한 그이의 입술이 멜빵 가방처럼 보였던 것이다.

 

암스트롱은 십대 초의 나이에 독립 기념일 축제에서 권총을 쏘았다는 죄로 경찰에 붙잡혔다. 그런데 신의 뜻이었는지 소년원에 갇힌 그이는 그 곳에서 코넷 연주법을 배웠다. 놀라운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아 그이는 곧 나팔수 겸 코넷 연주자로 뽑혔다. 십대 후반에 소년원에서 나온 그이는 그때부터 연주자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이는 클럽과 각종 퍼레이드는 물론 미시시피 강을 따라 뉴올리언스의 북쪽까지 먼 항해를 하는 증기선의 밴드에서 연주를 했다.

암스트롱은 킹 올리버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곧 이어 그이는 본격적으로 음악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 자신의 밴드인 "루이 암스트롱과 핫 파이브"를 만들었다.

 

그 뒤 시카고에서 뉴욕의 할렘가로 옮긴 그이는 뉴올리언스 재즈의 대명사가 되었고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그이가 재즈사에 남긴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특히 트럼펫계에서, 테너 색소폰의 아버지라 불리는 콜먼 호킨스를 비롯해 다른 악기 연주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재즈 보컬리스트들에게 끼친 영향도 큰데 스캣 보컬과 가사를 자유롭게 바꾸거나 되풀이하는 특이한 창법 개발이 그것이다.

 



Clockwise: Freddie Jenkins, Cootie Williams, Sonny Greer, Aurthur Whetsol, Jaun Tizol,

Wellman Braud, Harry Carney, Fred Guy, Barney Bigard, Joe Nanton, Johnny Hodges, and Duke Ellington seated at the piano.  Cotten Club in Newyork.

 

 


"코튼 클럽"의 뉴욕 재즈

할렘의 재즈를 이야기할 때 피아노 음악을 빼놓을 수 없는데 그 색채의 다채로움은 다른 도시의 어떤 스타일과도 견줄 수 없었다. 이러한 특색은 모던 재즈의 모태가 된 "비밥"이 태어나는 데 결정적인 동기를 주었다.

뉴욕 재즈는 천구백이십년대 뉴올리언스 재즈가 들어온 뒤 백인 댄스 오케스트라에 의해 연주되기 시작한 재즈와 할렘가의 연주자들에 의해 연주된 음악을 말한다.

 

루이 암스트롱이 전성기를 누리던 그 무렵 또 한 사람의 위대한 재즈 연주자가 뉴욕에 나타났다. 할렘가에 있는 백인들만 들어갈 수 있는 화려한 고급 클럽 "코튼 클럽"의 젊은 밴드 리더 듀크 엘링턴이었다. 코튼 클럽은 백인 상류층을 위한 고급 관광 클럽으로 쇼의 연출은 모두 흑인들이 맡고 있었지만 정작 흑인은 손님으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이십 세기의 가장 뛰어난 작곡가를 꼽는 데 있어 많은 음악 전문인들은 이고리 스트라빈스키, 벨라 바르토크에 이어 듀크 엘링턴을 꼽는다. 연주를 중시하는 재즈 음악에서 작곡과 편곡으로 뛰어난 사운드를 창시한 듀크 엘링턴의 업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지만 그 가운데서도 댄스 음악이나 거리의 음악에 지나지 않았던 재즈를 본격 음악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듀크는 워싱턴에서 백악관 집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았으며 흑인치고는 세련된 옷차림과 높은 기품으로 친구들로부터 "공작"이란 뜻의 듀크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이것이 곧장 그이의 이름이 되었다.

 

그이는 자신이 흑인이고 미국인임에 강한 자부심을 가졌던 음악인이었다. 그이는 이질적인 것을 음악적으로 받아들여 사랑이 담긴 메시지로 전달했으며 그이 팬들의 거개는 주로 지식인과 음악인들이었다.

그이는 무려 육백 곡에 달하는 엄청난 곡들을 작곡했는데 이는 모차르트의 작품 수와 맞먹는 기록이다.

 

 

 

 



The 1930s belonged to Swing - and to the radio and dancing. 

 

 


"이것이야말로 미국 음악이다"- 스윙 재즈

대공황의 깊은 늪에서 서서히 벗어날 징조를 보이던 천구백삼십오년, 미국에는 경쾌한 리듬의 발랄한 댄스 음악이 태어났다. 그 중심에 당시 스물여섯 살의 청년 클라리넷 주자인 베니 굿먼이 있었다.

시카고의 가난한 양복 재단사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굿먼은 천부적인 음악 재질을 타고난 젊은이였다.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열두 살에는 미시간 호의 유람선 밴드에서 연주를 할 정도였다. 열여섯 살 되던 해 로스앤젤레스로 나가 벤 폴락 악단의 멤버가 되어 뉴욕으로 진출하면서 그때부터 그이는 가장 바쁜 연주자가 되었다.

 

천구백삼십오년 로스앤젤레스의 팔로마 볼룸, 그이가 연주하는 동안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두 살 된 어린아이부터 여든 살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관객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베니 굿먼의 스윙 음악에 맞춰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이들은 "이것이야말로 미국의 음악이다"라고 외쳐댔다. 하룻밤 사이에 스윙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었다.

 

베니 굿먼의 스윙이 백인들로부터 호응을 얻은 데에는 굿먼이 백인이라는 까닭도 있었지만 더욱 큰 까닭은 음악 그 자체에 있었다. 그때까지 연주자 중심의 음악을 청중 중심의 음악으로 바꿔 놓았던 것이다. 굿먼은 지루하게 느껴지기 십상인 솔로 연주를 되도록 줄이고 악단 전체의 호화로운 사운드에 중점을 두는 편곡으로 그때까지 재즈에서 느껴지던 칙칙하고 허무주의적 분위기를 밝은 도시적 분위기로 바꾸어 놓았다. 그 결과 스윙은 재즈에 관심이 없던 대중들로부터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베니 굿먼의 또 하나의 업적은 현대적인 의미의 대중 음악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대중들에게 "판다"는 차원의 대중 음악은 베니 굿먼의 스윙이 처음이었다. 그이가 "스윙의 제왕"으로 불리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으며 그이를 시작으로 재즈는 흑인들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폭 넓은 팬을 확보해 나갔다.

 

 

 

 

 

 

 

 

 


In the mid-1940s with bebop performers such as saxophonist Charlie "Yardbird" Parker. 

 


"톡톡 튀는" 느낌의 비밥

 

천구백사십년대는 다양한 음악적 변화가 진행되던 시기였다.

스윙 재즈는 대중 속으로 깊게 파고 든 음악이기는 했으나 앙상블 중심이었기 때문에 즉흥 연주를 중히 여기던 실력 있는 연주자들에게 불만스러운 면이 많았다. 그 결과 그이들이 대안으로 찾았던 것이 바로 잼 세션이었다. 잼 세션이란 상업주의에 물든 재즈에 염증을 느낀 음악인들이 업소에서 일을 끝낸 뒤 일정한 장소에 모여 자신들의 기량을 펼쳐 보였던 연주 형태를 말한다. 잼 세션은 캔자스시티의 젊은 흑인 음악인들 사이에서 크게 성행했는데 그이들이 뉴욕으로 감에 따라 이 운동은 더욱 널리 퍼졌다. 젊은 연주자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색소폰 주자 레스터 영, 트럼펫의 디지 길레스피, 알토 색소폰의 찰리 파커, 피아노의 셀로니어스 몽크 들이 이 운동을 이끌었다.

 

이렇게 하여 생겨난 것이 비밥이다. 비밥이란 그 음악 특유의 "톡톡 튀는" 느낌을 잘 표현해 낸 의성어인데 그 뒤 그냥 밥으로 불리게 되었다.

 

비밥이 가장 인기를 끌었던 때는 천구백사십년대 후반으로 제이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였다. 이 운동의 중심이었던 찰리 파커는 소규모로 이루어진 밴드를 이끌며 뉴욕 오십이번가의 클럽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비밥은 멜로디, 리듬, 하모니 들에 있어 그때까지와는 다른 획기적인 변화를 시도하였는데 멜로디보다는 하모니를 중요시했고 코드 진행에 기초하여 애드립을 넓혀 나갔다.

 

모던 재즈 또는 메인스트림(주류) 재즈라고 불리는 것이 바로 이 비밥이다. 실제로 비밥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고 흑인의 스윙 재즈를 밑바탕으로 잼 세션에서 논리적으로 발전해 나간 장르이다. 이때부터 재즈의 중요한 본질인 즉흥 연주가 발전했고 춤을 추기 위한 재즈에서 감상을 위한 재즈로 발전했다. 그 뒤 비밥에 반발하여 다시 쿨 재즈가 나타났는데 이는 고전적인 성격을 준 다소 여유 있고 조용한 재즈다.

 

이렇게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하며 발전해 나가던 재즈는 천구백육십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록의 엄청난 열기에 눌려 버리게 되면서 프리 재즈, 아방가르드 재즈란 이름의 전위적 예술 운동으로 움츠러들게 된다.

 

 



Bitches Brew is an influential record in the history of jazz fusion.

 


록, 클래식까지 받아들인 퓨전 재즈

 

빈사 상태에 놓여 있던 천구백육십년대의 재즈계는 마일스 데이비스가 천구백육십구년에 발표한 <비치스 블루>로 한번에 원기를 되찾는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그때까지 재즈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채 앞으로 나아갈 바를 제시해 온 불세출의 인물이다. 데이비스는 폭발적인 록 기타리스트 지미 핸드릭스를 들으면서 길을 발견했다고 한다.

 

 

데이비스의 앨범 <비치스 블루>에는 어쿠스틱 피아노 대신에 일렉트로닉 피아노와 신시사이저를 썼고 콘트라베이스 대신에 베이스 기타와 록 리듬을 사용했다. 또 일렉트릭 기타, 콩가, 셰이커 들 같은 여러 가지 종류의 민속 악기 들 하여 지금까지 재즈 밴드에서 쓰지 않던 악기들을 써서 재즈에 여러 가지 요소들을 받아들였다. "퓨전"이란 섞는다는 뜻인데 록, 클래식 들을 받아들이고 합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퓨전 재즈가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재즈와 록의 사생아"라는 비난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제약 없이 자신의 이미지를 자유롭게 표현해 낸다는 점에서 곧 새로운 스타일로 자리를 잡았다.

 

천구백팔십년대, 천구백구십년대의 재즈계는 팝, 록, 월드 뮤직 들 하여 여러 장르가 섞여 나가는 퓨전과 독일, 뉴욕 들을 중심으로 한 현대 음악과의 융합, 그리고 트럼페터 윈턴 마설리스에 의해 주도된 "메인스트림(정통)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서로 엇갈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복잡한 주도권 다툼에서 가장 돋보이는 그룹이 윈턴 마설리스를 중심으로, "고전주의"로 돌아가자고 주장한 부류였다. 어떤 이들은 앞으로의 재즈사는 마설리스를 중심으로 적어질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점치기도 한다.


 

 

 

 

 

 

 

 



이땅에서의 재즈

 

 

우리 나라에 재즈가 언제 들어왔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홍 난파가 경성 중앙 방송국 양악부 책임자로 있으면서 재즈를 연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천구백삼십육년부터 경성 중앙 방송국에 근무하던 난파는 당시 경성 중앙 방송 관현악단을 조직해 천구백사십년에 공연을 가졌다. 이미 그이는 천구백삼십일년 미국에 유학해 셔우드 음악 대학원에서 재즈를 익혔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몇몇 지식인층에 의해 빅 밴드 시절의 딕시랜드 재즈가 선보이기도 했으나 곧 적성 국가의 음악이라 하여 규제에 묶여 버렸다. 그러다가 광복 뒤 미국 군사 고문단이 들어오면서 생긴 장교 클럽에 의해 미국의 대중 음악이 소개되었다. 하지만 이 또한 일반 사람들이 접하기는 쉽지 않았다.

 

한국 전쟁이 터지자 미군과 함께 미국의 대중 음악이 물밀듯 밀려들어왔다. 음악 장르가 세분되었던 시절이 아니었던 까닭에 재즈와 스탠더드 팝, 컨트리가 한꺼번에 묻어 들어왔다.

휴전이 되고 나자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미군에서 흘러 나온 그 당시 유행하던 음악이 연주되었는데 베니 굿먼의 <싱, 싱, 싱>은 초등학교 학생들까지 흥얼거릴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미팔군 쇼 무대가 생기자 우리 나라의 많은 연예인들이 이 무대에 섰다. 우리가 이름을 기억하는 많은 원로급 연예인들이 이 무대를 생활의 터전으로 삼아 활발히 활동했는데 여기에서는 특별히 말하지 않겠다.

 

우리의 척박한 환경에서도 고집스럽게 재즈만을 고집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다. 그 가운데 몇 명을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우리 나라에서 단 하나뿐인 재즈 연구인이자 작곡가인 베이스 주자 이 판근을 들 수 있다. 그이는 다른 음악인들이 생계를 위해 방송국의 경음악단이나 대중 음악 작곡가로 전업한 데 반해 지금까지 오로지 재즈만 해 왔으며 "야누스 동호회"를 만든 이로 지금 살아 있는 가장 오래된 재즈 아티스트다.

우리 나라 재즈의 대모라 불리는 박 성연은 이 판근, 정 성조 들과 그이가 경영하는 카페 야누스의 이름을 딴 "야누스 동호회"를 만들어 수많은 발표회를 가진 열정파 여가수로 알려져 있다. 그 밖에 "한국의 마일스 데이비스"로 알려진 강 대관, 드러머 조 상국, 홍콩의 재즈 클럽에서 십팔 년 동안 연주했다는 조 정수, 테너 색소폰 연주자 김 수열, 드럼의 유 영수 들도 재즈 발전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이들이다. 다른 나라에서 더 알려진 알토 색소폰의 강 태환, 트럼펫의 최 선배, 퍼커션의 김 대환도 널리 알려진 이들이다.

또한 보컬리스트 김 준과 같은 구성원인 피아노의 이 영경, 베이스의 장 응규, 보컬리스트 배 미경 들이 있고 신 관웅이 이끄는 신 관웅 빅 밴드, 퍼커션의 유 복성, 최 세환, 이 정식 들이 우리의 재즈계를 이끌어 가고 있다.

남사당 출신으로 우리의 장단을 세계에 알리고 있는 김 덕수 패는 그 힘찬 리듬으로 여러 재즈 연주자들과 함께 재즈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특히 눈길을 끌고 있는 연주자로 유진 박을 꼽을 수 있다. 유진 박은 줄리어드 음악 대학 출신으로 정통 클래식을 공부한 바이올리니스트이다. 여러 차례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기도 한 그이는 보장된 비르투오소의 길을 포기하고 우리들에게 수준 높은 음악을 들려 주고 있다.

 

음반 판매점에 가면 재즈 코너가 빠짐없이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그 판매율은 아직도 적은 편이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먼 것 같다. 그러나 재즈만을 전문으로 교육하는 기관도 생기고 나라 안팎으로 널리 알려진 재즈 연주자들의 공연을 알리는 소식도 자주 접할 수 있다.

 

한 마리의 나비를 보고 봄이 왔다고 미리 판단할 일은 아니지만 나비가 보이면 봄은 이미 성큼 우리 곁에 와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재즈는 그렇게 오고 있을 것이다.

 

 

 



김 진술/이 글을 쓴 김 진술 씨는 출판 기획 회사 "서울 기획"의 대표다. (주)동화 출판사 편집장, 삶과 꿈 출판 기획 실장 들을 거치면서 많은 음악 관련 책과 음반을 만들었다. <세계 음악 대전집>, <세계 성악 대전집>, <피아노 음악 대전집>, <재즈와 클래식의 행복한 만남>, <재즈 명반 백이선> 들을 기획, 출판하였다. 지금은 책 만드는 일과 글쓰는 일을 하고 있다.